불(佛)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reli/불佛 영등포 소식,소비자평가,뉴스,영등포구 지역포털 Sat, 08 Aug 2026 16:22:05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7.0.4 https://ydpcj.kr/?esm_media_gateway=1&attachment_id=21979&size=full&v=1784315567 불(佛)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reli/불佛 32 32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5 https://ydpcj.kr/esm/22028 https://ydpcj.kr/esm/22028#respond Sat, 08 Aug 2026 16:22:04 +0000 https://ydpcj.kr/?p=22028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5 📩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시지요. 잠시 시원한 그늘에 쉬어 가듯, 부처님 말씀으로 마음을 쉬어 보세요. 향을 가까이하면 향기가 배듯이 우리 마음도 함께하는 인연을 따라 조금씩 물들어 갑니다. 나는 어떤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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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5

📩 연일 이어지는 무더위에

몸도 마음도 많이 지치시지요.
잠시 시원한 그늘에 쉬어 가듯,
부처님 말씀으로 마음을 쉬어 보세요.
향을 가까이하면 향기가 배듯이
우리 마음도 함께하는 인연을 따라
조금씩 물들어 갑니다.
나는 어떤 인연 속에 머물고 있으며,
누군가에게 어떤 향기로 남고 있을까요?
오늘 경전산책에서
향과 비린내의 비유를 통해
좋은 인연의 의미를 함께 살펴봅니다.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5www.youtube.com

[경전산책 65]
사람은 누구를 닮아가는가
– 함께하는 인연이 나를 만든다
오래전,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시면서 여러 제자들과 함께 중생들을 가르치실 때의 일이었다. 웬 종이 한 장이 땅에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제자 아난이 얼른 주웠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땅에 도로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난은 바로 그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손에서 문득 짙은 향냄새가 났다.
길을 조금 더 나아가자 땅 위에 돋은 풀 위로 회오리바람이 부는 것이 보였다. 아난은 다시 그 풀을 뜯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땅에 도로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셨다. 아난은 바로 그것을 땅에 내려놓았다. 손에서 문득 고약한 냄새가 났다. 아난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였다.
얼마 후, 아난은 정사에 돌아와 부처님께 그 이유를 여쭈었다.
“어떤 까닭으로 종이를 쥐었던 손에서는 향냄새가 나고, 풀을 쥐었던 손에서는 고약한 냄새가 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종이는 원래 향냄새가 나는 땅에서 왔기에 향냄새가 종이에 배었으며 이러한 까닭에 네 손에서 향냄새가 났던 것이다. 그 풀은 원래 고약한 냄새가 나는 땅에서 왔기에 네 손에서 고약한 냄새가 났던 것이다. 현명한 사람과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마치 종이에 향냄새가 배어드는 것과 같으며 악독한 사람과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마치 고약한 냄새가 풀에 배어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현명한 이를 가까이하면 지혜를 이루고, 어리석은 이를 가까이하면 미혹만 늘어난다. 나를 해롭게 하는 벗에 세 부류가 있고, 나를 이롭게 하는 벗에 세 부류가 있다’고 가르쳤다.”
이와 같이 말씀하셨으니 깊이 사유해야 할 것이다.
『천존설아육왕비유경』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들과 함께 정사로 돌아오시던 도중에 그들이 처자를 연모하여 각기 후퇴할 뜻이 있음을 아셨다. 게다가 때마침 하늘에서 비가 내려 그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고 답답하게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아시고 곧 신통으로 길가에 수십 칸의 집을 짓고 그 안에 들어가 비를 피하였다. 그때 지붕이 뚫어져 비가 새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지붕의 새는 것을 계기로 다음 게송을 읊으셨다.
지붕을 촘촘히 잇지 않으면
하늘에서 비가 올 때 새는 것처럼
마음을 단속해 오롯이 행하지 않으면
음탕한 생각이 계율을 깨뜨리리라.
지붕을 촘촘히 잘 이으면
비가 와도 새지 않는 것처럼
마음을 단속해 오롯이 행하면
음탕한 마음이 생기지 않으리라.
그러자 70명의 사문들은 이 게송을 듣고, 비록 억지로 애써 보았으나 그래도 마음은 답답하였다. 비가 그쳐 앞으로 나갈 때 헌 종이가 땅에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을 집어라.”
비구들은 분부대로 그것을 집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물으셨다.
“그것은 무엇에 쓰였던 종이인가?”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지금은 비록 버려져 있지만 향내는 여전합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걸어가는데 끊어진 새끼 토막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저것을 집어라.”
비구들은 분부대로 그것을 집었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그것은 무엇에 쓰였던 새끼줄인가?”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새끼에서 비린내가 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생선을 묶었던 새끼줄인 듯합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대개 어떤 물건이나 본래는 깨끗하였건만, 모두 인연을 따라 죄와 복을 일으키는 것이다. 현명한 이를 가까이하면 도의 뜻이 높아지고 우매한 일을 벗하면 재앙이 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종이가 향을 가까이하였기 때문에 향내가 나고 새끼는 생선을 묶었기 때문에 비린내가 나는 것과 같아서 차츰 물들어 친해지면서도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부처님께 이어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비천한 사람이 남을 물들이는 것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하는 것 같아
차츰차츰 미혹하여 허물을 익히다가
저도 모르게 악한 사람이 된다.
어진 사람이 남을 물들이는 것
향냄새를 가까이하는 것같아
나날이 지혜로워져 선함을 익히다가
아름답고 청결한 행을 이루리라.
『법구비유경』 1권 「쌍요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5]
사람은 누구를 닮아가는가
– 함께하는 인연이 나를 만든다
안녕하세요.
우리는 스스로 선택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내 생각은 내가 만든 것이고, 내 말과 행동도 내가 결정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오래 마음에 남고, 함께 지내는 사람의 분위기가 나도 모르게 내 마음에 스며드는 것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밝아지고, 거친 말을 자주 들으면 나도 모르게 말이 거칠어집니다.
오늘은 경전에 전하는 향을 싼 종이와 생선 새끼줄의 비유를 통해, 함께하는 인연이 우리 마음을 어떻게 물들이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과 함께 길을 걷고 계셨습니다.
그 비구들 가운데에는 마음이 흔들리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출가의 길을 걷고 있었지만, 문득 가족과 지난 삶이 떠오르고,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그날은 하늘마저 흐렸습니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고, 길은 점점 어두워졌습니다.
비구들의 마음도 그와 같았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히 걷고 있었지만, 속에서는 갈등과 번민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마음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해 길가에 떨어진 물건을 보게 하셨습니다.
길가에 버려진 종이 한 장이 보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을 집어 보아라.”
비구들이 종이를 집어 들자 손에서 은은한 향기가 퍼졌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그것을 내려놓아라.”
조금 더 길을 가다가 이번에는 끊어진 새끼줄이 보였습니다.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저것을 집어 보아라.”
비구들이 그것을 집어 들자 이번에는 손에서 비린내가 올라왔습니다.
그때 비구들이 그 까닭을 몰라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종이를 잡았을 때는 향기가 나고, 새끼줄을 잡았을 때는 냄새가 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종이는 향을 가까이하였기 때문에 향기가 배었고, 새끼줄은 생선을 가까이하였기 때문에 비린내가 배었다. 사람도 이와 같다.”
이 짧은 비유 안에는 사람이 인연을 따라 물들어 간다는 중요한 가르침이 담겨 있습니다.
종이는 스스로 향을 만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향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향기가 배었습니다.
새끼줄도 처음부터 비린내를 지닌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생선을 가까이했기 때문에 비린내가 배었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독립적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매일 누군가의 말과 태도와 마음에 조금씩 물들어 갑니다.
처음에는 “그냥 함께 있는 것뿐”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사람의 말투가 내 말투가 되고, 그 사람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며, 그 사람의 기준이 내 삶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남을 비난하는 이야기에 오래 머물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람을 보는 눈이 차가워집니다.
욕심을 당연하게 여기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으면 내 마음에도 욕심이 자연스러운 것처럼 자리 잡습니다.
반대로, 맑은 사람 곁에 있으면 말하지 않아도 마음이 정돈됩니다.
자비로운 사람 곁에 있으면 나도 누군가에게 조금 더 부드럽게 대하고 싶어집니다.
꾸준히 수행하는 사람을 가까이하면 내 마음에도 정진하려는 힘이 생깁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뜻을 게송으로도 말씀하셨습니다.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하면 차츰차츰 허물에 물들어 저도 모르게 악한 사람이 되고, 향기로운 것을 가까이하면 나날이 지혜로워져 아름답고 청정한 행을 이루게 된다.”
이 가르침은 오늘 우리의 삶에도 그대로 이어집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만 가까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보는 화면, 듣는 말, 읽는 글, 머무는 모임, 반복해서 보는 영상도 모두 내 마음을 물들이는 인연입니다.
어떤 말은 내 마음을 거칠게 만들고, 어떤 말은 내 마음을 맑게 합니다.
어떤 만남은 나를 더 욕심 많게 만들고, 어떤 만남은 나를 더 자비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무엇을 가까이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나는 지금 어떤 향기 속에 머물고 있는가.
나는 어떤 말과 생각에 자주 물들고 있는가.
내 곁의 인연은 내 마음을 맑게 하는가, 아니면 점점 흐리게 하는가.
그렇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나누고 판단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저 사람은 가까이하면 안 된다.”
이렇게 남을 정죄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먼저 내 마음이 어디에 물들고 있는지 깨어 살피라는 뜻입니다.
또 내가 누군가에게 어떤 향기가 되고 있는지도 돌아보라는 뜻입니다.
나는 누군가에게 평안한 인연인가.
나는 누군가의 마음을 맑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도 모르게 불평과 원망과 거친 마음을 전하고 있는가.
향은 말없이 향기를 냅니다. 좋은 인연도 그렇습니다.
억지로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주변 사람에게 조용히 좋은 영향을 줍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을 마치며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나는 무엇을 가까이하고 있는가.
나는 누구와 함께하며 어떤 마음을 닮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누군가에게 어떤 향기로 남고 있는가.
사람은 혼자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함께하는 인연 속에서 조금씩 물들고, 조금씩 닮아가며, 조금씩 달라집니다.
오늘 하루, 나를 맑게 하는 인연을 가까이하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맑은 향기가 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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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4 https://ydpcj.kr/esm/22024 https://ydpcj.kr/esm/22024#respond Sat, 01 Aug 2026 13:58:15 +0000 https://ydpcj.kr/?p=22024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4 🌿 오늘은 제가 유튜브에 경전산책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영상도 따뜻하게 들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의 경전산책은 『해심밀경』에 전하는 여섯 바라밀의 가르침입니다. 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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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4

🌿 오늘은 제가 유튜브에 경전산책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영상도 따뜻하게 들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의 경전산책은 『해심밀경』에 전하는 여섯 바라밀의 가르침입니다.
좋은 마음을 냈는데도 왜 금세 흔들릴까요?
왜 수행은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질까요?
부처님께서는 앞의 수행이 다음 수행을 이끌어, 보시에서 지혜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1년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오늘도 부처님 가르침을 함께 나눕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성불하십시오.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4www.youtube.com

[경전산책 64]
왜 수행에는 순서가 있을까
— 『해심밀경』이 말하는 여섯 바라밀의 길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여섯 가지 바라밀다를 말씀하시면서 이런 차례를 두셨습니까?”
“선남자여, 능히 다음 다음으로 이끌어 냄의 의지가 되는 까닭이다. 이른바 모든 보살이 만일 몸과 재물에 대하여 돌아보거나 인색함이 없다면 곧 청정한 금계(禁戒)를 받아 지닐 수 있고, 금계를 보호하기 위해 곧 인욕(忍辱)을 닦고, 인욕을 닦고는 능히 정진을 내고, 정진을 일으키고는 능히 정려를 성취하고, 정려를 갖추고는 곧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바라밀다를 이와 같은 차례로 말한 것이다.”
[중략]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바라밀다를 바라밀다라 부릅니까?”
“선남자여, 다섯 가지 인연 때문이다. 첫째는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까닭이요, 둘째는 돌아보고 생각함이 없는 까닭이요, 셋째는 죄와 허물이 없는 까닭이요, 넷째는 분별이 없는 까닭이요, 다섯째는 바르게 회향하는 까닭이다. 물들고 집착함이 없는 까닭이란, 이른바 바라밀다와 어긋나는 모든 일에 물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돌아보고 생각함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일체 바라밀다의 모든 과보와 이숙(異熟), 그리고 은혜를 갚는 가운데 마음에 얽매임이 없는 것이다. 죄와 허물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이러한 바라밀다에서 빈틈없이 잡되고 물든 법과 그릇된 방편을 벗어나는 것이다. 분별이 없다는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은 바라밀다에서 말과 같이 자상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바르게 회향한다는 것은 이른바 이와 같이 지은 바와 모든 바라밀다로써 위없는 큰 보리의 과보를 돌이켜 구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바라밀다와 어긋나는 모든 것입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이 일에 대략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재물과 부귀에 자재하길 원하고 모든 욕락(欲樂)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또는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둘째는 좋아하는 것에 따라 몸과 말과 뜻을 마음대로 하고 현행하는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셋째는 다른 이가 가벼이 여기고 업신여김을 견디지 못하는 가운데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넷째는 부지런히 닦지 않고 욕망에 집착하는 가운데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다섯째는 세간의 잡되고 어지러운 행으로 떠들썩한 곳에서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요, 여섯째는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 말하고 희론하는 것을 깊이 공덕이라거나 수승한 이익이라고 보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일체 바라밀다에는 어떤 과보와 이숙(異熟)이 있습니까?”
“선남자여, 마땅히 알라. 여기에도 또한 여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큰 재물과 부귀를 얻음이요, 둘째는 좋은 세계에 태어남이요, 셋째는 원수가 없어지고 망가지는 일이 없어지며 모든 기쁨과 즐거움이 많아짐이요, 넷째는 중생의 주인이 됨이요, 다섯째는 몸에 번뇌와 해로움이 없음이요, 여섯째는 가문의 번창이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密經) 제4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4]
왜 수행에는 순서가 있을까
— 『해심밀경』이 말하는 여섯 바라밀의 길
안녕하세요.
우리는 수행을 한다고 말합니다.
좋은 일을 하고, 마음을 다스리려고 애쓰며,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왜 어떤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어떤 수행은 깊어지지 않을까요?
좋은 마음을 냈는데도 금세 흔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늘은 『해심밀경』에 나오는 여섯 가지 바라밀의 가르침을 통해 그 이유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한 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까닭으로 여섯 가지 바라밀을 이러한 순서로 말씀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매우 중요합니다. 수행은 따로따로 쌓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의 수행이 다음 수행을 이끌고, 앞의 마음이 뒤의 마음을 열어 주며, 그렇게 조금씩 깊어져 갑니다.
먼저, 보시입니다.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이 줄어들지 않으면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그래서 보시는 단순히 주는 행위가 아니라 집착을 내려놓는 첫걸음입니다.
이 집착이 옅어질 때, 비로소 계를 지키는 힘이 생깁니다.
지계는 억지로 참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흐트러지지 않는 삶의 중심을 세우는 일입니다.
그러나 계를 지키다 보면 부딪히는 순간이 옵니다.
억울함이 생기고, 상처를 받고, 분노가 일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이 인욕입니다.
인욕은 감정을 억지로 눌러 담는 것이 아닙니다.
흔들리는 상황 속에서도 마음을 잃지 않는 힘을 기르는 일입니다.
이 힘이 생기면 비로소 정진이 이어집니다.
정진은 자신을 억지로 몰아붙이는 노력이 아닙니다.
바른 방향을 잃지 않고 계속 나아가는 힘입니다.
그리고 이 흐름이 이어지면 마음은 점점 고요해집니다.
이것이 선정입니다.
마음이 고요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있는 그대로를 보게 됩니다.
그것이 지혜입니다.
이렇게 여섯 바라밀은 서로 끊어진 여섯 가지가 아닙니다.
보시가 지계를 이끌고, 지계가 인욕을 이끌며, 인욕이 정진을 이끌고,
정진이 선정을 이끌며, 선정이 지혜를 밝히는 길입니다.
수행은 이렇게 하나의 흐름으로 깊어져 갑니다.
여기서 경전은 바라밀이라는 말의 뜻도 함께 밝혀 줍니다.
보살이 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바라밀다를 바라밀다라 부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집착이 없기 때문이며, 마음에 걸림이 없기 때문이며, 그릇됨이 없기 때문이며, 분별에 머물지 않기 때문이며, 마침내 바르게 회향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도 중요합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집착이 있으면 바라밀이 되기 어렵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내가 했다”는 마음이 강하게 남아 있다면, 아직 바라밀의 길은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 베풀고, 칭찬받기 위해 참고, 내가 훌륭하다는 생각으로 수행한다면 그 마음에는 여전히 걸림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겉모습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 일을 어떤 마음으로 하고 있는가.
그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어 경전은 바라밀의 길과 어긋나는 마음도 말합니다.
“세존이시여, 무엇이 바라밀다와 어긋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수행과 어긋나는 마음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때로 욕망을 따르는 것을 좋은 일이라 여기고, 쉬운 길을 가면서도 그것이 옳다고 믿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쉽게 흔들리고, 노력하지 않으면서도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마음이 바라밀의 길을 흐트러뜨립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모습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잘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 안에 집착과 흔들림이 함께 있습니다.
좋은 일을 하면서도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고,
참는다고 하면서도 속으로는 원망을 키울 때가 있습니다.
정진한다고 하면서도 쉬운 길만 찾고,
배운다고 하면서도 내 생각을 내려놓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은 겉으로 보이는 모습보다 마음을 바로 보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마지막으로 보살이 다시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러한 바라밀다에는 어떤 과보가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 길을 따르는 사람은 삶이 점차 안정되고, 두려움과 원한이 줄어들며, 괴로움이 가벼워지고, 마침내 흔들림 없는 삶으로 나아간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큰 용기를 줍니다.
수행은 당장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분명히 삶을 바꾸어 갑니다.
오늘 조금 내려놓은 집착이 내일의 마음을 가볍게 합니다.
오늘 한 번 참아 낸 마음이 내일의 분노를 줄입니다.
오늘 한 걸음 정진한 힘이 내일의 삶을 조금 더 바른 길로 이끕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을 마치며 이런 물음을 남겨 봅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내려놓고 있는가?
나는 지금 어떤 마음으로 선한 일을 하고 있는가.
나는 이 길을 한 걸음이라도 이어가고 있는가?
잠시 멈추어 스스로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수행은 멀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이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결국 삶 전체를 바꾸어 갑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썸네일
메인
왜 수행은
제자리걸음일까?
보조
앞의 수행이
다음 길을 연다
하단
『해심밀경』
유튜브 설명란 (최적화 완성본)
#불교 #경전산책 #해심밀경 #육바라밀
📖 좋은 마음을 냈는데도
왜 금세 흔들릴까요?
왜 어떤 노력은 오래 가지 못하고,
어떤 수행은 깊어지지 않을까요?
『해심밀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여섯 바라밀을 이 순서로 말씀하신 까닭을
“앞의 것이 뒤의 것을 이끌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보시는 지계를 이끌고,
지계는 인욕을 이끌며,
인욕은 정진을 이끌고,
정진은 선정을 이끌며,
선정은 지혜를 밝힙니다.
이번 경전산책에서는
『해심밀경』의 가르침을 통해
여섯 바라밀이 어떻게 하나의 흐름으로 깊어지고,
우리 삶을 어떻게 바꾸어 가는지 함께 살펴봅니다. 🙏
📌 채널 소개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은
팔만대장경 속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늘 우리의 삶에 맞게 쉽고 짧게 풀어 전하는 채널입니다.
바쁜 일상 속 잠시 멈추어
경전 한 구절로 마음을 돌아보고,
삶의 방향을 다시 밝혀 보는 시간을 함께합니다.
🙏 이 영상이 도움이 되셨다면
주변 분들과 함께 나누어 주세요.
함께 나누는 것이 곧 전법입니다.
📚 경전 출처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4권
🔖 해시태그
#불교경전 #부처님말씀 #해심밀경 #육바라밀 #바라밀 #보살수행 #보시 #지계 #인욕 #정진 #선정 #지혜 #마음공부 #불교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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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은 제가 유튜브에 경전산책 영상을 올리기 시작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영상도 따뜻하게 들어 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
오늘의 경전산책은 『해심밀경』에 전하는 여섯 바라밀의 가르침입니다.
좋은 마음을 냈는데도 왜 금세 흔들릴까요?
왜 수행은 제자리걸음처럼 느껴질까요?
부처님께서는 앞의 수행이 다음 수행을 이끌어, 보시에서 지혜로 나아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지난 1년의 고마운 마음을 담아 오늘도 부처님 가르침을 함께 나눕니다.
늘 감사드립니다. 성불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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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 https://ydpcj.kr/esm/22018 https://ydpcj.kr/esm/22018#respond Sat, 25 Jul 2026 18:13:15 +0000 https://ydpcj.kr/?p=22018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 📩 많이 듣고도 왜 삶은 쉽게 바뀌지 않을까요? 『해심밀경』은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사수의 길을 말합니다. 배움이 삶을 바꾸는 세 걸음,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_ctqvg-ilD4&pp=0gcJCaMLAYcqIYzv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www.youtube.com [경전산책 63] 자씨보살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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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

📩 많이 듣고도

왜 삶은 쉽게 바뀌지 않을까요?
『해심밀경』은
듣고, 생각하고, 실천하는
문사수의 길을 말합니다.
배움이 삶을 바꾸는 세 걸음,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www.youtube.com

[경전산책 63]

자씨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思所成慧]로 그 뜻을 깨달으며, 사마타ㆍ비발사나를 닦아서 이루는 지혜[修所成慧]로 그 뜻을 깨닫는다 하시니, 이는 어떻게 다릅니까?”

“선남자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는 문자에 의지해 다만 그 말대로만 할 뿐이지, 아직 그 의취(意趣)를 능통하지는 못하며,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역시 문자에 의지하나 꼭 말대로만 하지는 않고 그 의취를 능통한다. 그러나 아직 현전하지는 못하며, 해탈에 수순하나 아직 해탈을 이루는 뜻을 받아들이지는 못한다. 모든 보살의 닦아서 이룬 지혜는 문자에 의지하기도 하고 문자에 의지하지 않기도 하며, 말씀대로 하기도 하고 말씀대로 하지 않기도 하며, 의취(意趣)에 능통하고, 알아야 할 일의 동분(同分) 삼마지 의 대상인 영상이 현전하며, 해탈에 아주 잘 수순하며, 이미 해탈을 성취하는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 선남자여, 이것을 세 가지 뜻을 아는 차별이라 한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3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3]

듣고, 생각하고, 살아내라

– 삶이 바뀌는 세 걸음 (문사수의 가르침)

안녕하세요.

지금 우리는 얼마나 듣고 있을까요?

그리고 들은 것을 얼마나 깊이 이해하고 있을까요?

더 나아가, 그것을 삶 속에서 살아내고 있을까요?

우리는 많은 것을 듣습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잠시 스쳐 지나갈 뿐,

우리의 삶을 바꾸지는 못합니다.

오늘은 『해심밀경』에 나오는 문사수(聞思修)의 가르침을 통해

배움이 어떻게 깨달음으로 이어지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자씨보살(慈氏菩薩), 곧 미륵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이루는 지혜로 깨닫고,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로 깨닫고,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으로 이루는 지혜로 깨닫는다고 하시니, 이 셋은 어떻게 다릅니까?”

부처님께서는 지혜가 깊어지는 길을 차근차근 밝혀 주셨습니다.

듣는 지혜는 말과 글을 따라 이해하는 자리이고,

생각하는 지혜는 그 뜻을 스스로 헤아리는 자리이며,

수행의 지혜는 그 진리가 마음에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이 가르침은 하나의 물음으로 우리에게 되돌아옵니다.

나는 지금 듣는 데 머물러 있는가, 아니면 살아내고 있는가.

이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세 가지 지혜의 차이를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지혜를 불교에서는 문혜(聞慧), 사혜(思慧), 수혜(修慧), 곧 삼혜(三慧)라고 합니다.

먼저, 들어서 이루는 지혜, 곧 문혜입니다.

이 자리에서는 가르침을 듣고 이해하지만

그 뜻을 온전히 꿰뚫은 데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해탈로 향하는 길에 들어섰을 뿐, 그것이 아직 삶이 되지는 못한 자리입니다.

다음은 생각하여 이루는 지혜, 곧 사혜입니다.

이 단계에서는 “이 말은 어떤 뜻일까?”

“이 가르침이 내 삶에서는 어떻게 드러나는가?”

가르침을 스스로 되새기며

그 뜻을 분명히 이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직 그 진리가 마음 앞에 분명히 드러나는 데에는 이르지 못합니다.

마지막은 닦아서 이루는 지혜, 곧 수혜입니다.

이 단계에 이르면 가르침은 더 이상 생각이 아니라 삶이 됩니다.

말에 의지하기도 하고,

말을 떠나기도 하며,

그 뜻을 완전히 통달하여 마침내 그 진리가 마음 앞에 분명히 드러납니다.

이제는 이해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그대로 살아내게 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새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지혜는 서로 떨어진 단계가 아니라,

깊어져 가는 하나의 흐름이라는 점입니다.

듣고, 생각하고, 마침내 살아내는 것.

이 흐름이 이어질 때 비로소 배움은 지식이 아니라 깨달음이 됩니다.

같은 가르침을 들어도

누군가는 말로만 알고,

누군가는 깊이 이해하며,

누군가는 삶으로 살아냅니다.

그 차이가 바로 지혜의 깊이이며, 수행의 차이입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좋은 말을 듣고 감동하는 일은 많지만,

그것이 삶이 되는 순간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라도 실제로 살아내기 시작하면

삶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부처님은 멀리 있는 깨달음을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듣고 있는가,

깊이 생각하고 있는가,

그리고 살아내고 있는가를 조용히 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질문 하나를 마음에 남기고 마치겠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듣고 있는가?

나는 그것을 정말 깊이 생각해 보았는가?

그리고 나는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고 있는가?

잠시 멈추어 자신의 삶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배움은 지식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깨달음으로 조용히 스며듭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깨달음은 내 삶이 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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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https://ydpcj.kr/esm/21963 https://ydpcj.kr/esm/21963#respond Fri, 17 Jul 2026 15:06:27 +0000 https://ydpcj.kr/?p=21963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진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일까요? 『해심밀경』이 말하는 마음의 비밀을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mfPr_Q9cCek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www.youtube.com [경전산책 62] 뉴스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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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진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일까요?
『해심밀경』이 말하는
마음의 비밀을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www.youtube.com

[경전산책 62]

뉴스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때 덕본(德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법상(法相)에 공교한 보살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란 어디에 한하여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께서는 어디에 한하여 그들을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덕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ㆍ사람ㆍ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모든 법상을 말하리라.” 이른바 모든 법상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인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게 세워진 일체 법의 자성과 차별이고, 나아가 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나아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덩어리를 부르고 모은다.
무엇이 모든 법의 원성실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를, 모든 보살들은 용맹 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생각하고 잘못됨 없이 사유하는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통달할 수 있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바야흐로 원만하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변계소집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 모습 없는 법[無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의타기상을 깨닫는다면 곧 여실히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雜染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원성실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一切淸淨相法]을 깨달을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다면 곧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을 것이요, 만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다면 곧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모든 보살은 여실히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깨닫는 까닭에, 여실히 모든 모습 없는 법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과 청정한 모습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 까닭에 온갖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고,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 까닭에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한다. 이에 한하여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들은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
그때 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바라건대 여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밀의를 해석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ㆍ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ㆍ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선남자여, 무엇이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거짓된 이름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이 된 것이요, 자상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다른 연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요,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는 까닭에 무자성성이라 부르니, 즉 인연으로 생긴 법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이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라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의타기상은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부른다. 또 모든 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을 승의(勝義)라 하며, 또는 무자성성(無自性性)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 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며, 무자성성에서 나타난 것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지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상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꼭두각시의 모형과 같아서 생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1분(分)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허공은 오직 모든 색(色)이 없는 성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일체 처소에 두루 함과 같이, 1분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법무아의 성품이 나타난 것인 까닭이며, 일체에 보편한 까닭이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2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안녕하세요.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세상,
정말 있는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이 덧붙여 만든 또 하나의 세계일까요?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가 내린 판단도 대부분 맞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믿음부터 다시 물으십니다.
오늘은 『해심밀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덕본(德本)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모습을 잘 아는 보살이라 하셨는데,
어떤 이가 그 모든 법상(法相)을 제대로 아는 보살입니까?”
이에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실제보다 덧붙여 보기도 하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기도 하며,
마침내 분별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제 경전에 나오는 표현으로 그 하나하나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듯이,
우리는 실제와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눈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현실 위에 내 생각과 감정을 덧붙여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
“나는 왜 항상 안 될까”
이런 생각도 사실이라기보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해석일 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둘째, 의타기상(依他起相)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그저 마음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 잠시 드러난 모습입니다.
꽃 한 송이도 햇빛과 물과 바람과 시간, 이 모든 인연이 모여 피어나듯이,
나 역시 수많은 인연 속에서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기대어 일어나고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셋째, 원성실상(圓成實相)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이러한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마음은 고요해지고 왜곡 없이 드러나는 진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생각을 덧붙이면 괴로움이 되고,
인연으로 보면 한 걸음 벗어나게 되며,
그대로 보면 집착이 사라집니다.
즉,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차이가 괴로움과 자유를 가르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세 가지 모습조차 붙잡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처음에는 없는 것을 만들어 괴로워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인연으로 생긴 것조차 고정된 실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이해한 것,
심지어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여기는 생각조차
모두 잠시 나타난 것일 뿐,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했을 때
우리는 “나를 무시했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여러 조건이 모여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 해석은 내 마음이 덧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그 감정조차 붙잡을 실체가 없는 흐름일 뿐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덜 괴롭고, 조금 더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다르게 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생각, 그것마저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생각과 감정,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것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 곧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진짜라고 착각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마음은 가벼워지고
집착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질문 하나를 마음에 남기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일까요,
아니면 생각일까요?
그리고 그 생각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잠시 멈추어 스스로의 마음을 조용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우리가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놓여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발행정보

제호: 영등포 소비자저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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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행처: 영등포 소비자저널 편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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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https://ydpcj.kr/esm/21933 https://ydpcj.kr/esm/21933#respond Mon, 13 Jul 2026 07:56:56 +0000 https://ydpcj.kr/?p=21933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진실일까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유위다, 무위다. 『해심밀경』은 그 모든 이름과 생각을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멈추고 함께 들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Erqg9X9Haz4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www.youtube.com [경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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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진실일까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유위다, 무위다.
『해심밀경』은
그 모든 이름과 생각을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멈추고 함께 들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www.youtube.com

[경전산책 61]
그때 여리청문(如理請問)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最勝子)여, 일체 법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체 법이 둘이 아니라 할 때, 어떤 것이 일체 법이며, 왜 둘이 없다고 합니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여리청문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함이 있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함이 없는 무위(無爲)입니다. 이 가운데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역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여리청문보살이 다시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여, 왜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고 유위도 아닙니까?”
“선남자여, 유위란 곧 본사(本師)께서 거짓으로 시설(施設)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인 말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 하신 말씀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인 말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유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유위와 무위를 벗어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 없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法性)에서 남들도 현전에 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유위라 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역시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의 말로 말한 것이어서 진실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무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유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무위와 유위를 떠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한 것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없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일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무위라 한 것입니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말로 붙잡을 수 없는 진실
– 유위와 무위는 왜 둘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우리는 늘 이것은 있다, 저것은 없다. 이것은 맞다, 저것은 틀리다.
이렇게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구분들은 정말로 진실일까요?
만약 그 모든 판단이 이름과 생각일 뿐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해심밀경』 제1권에 나오는 아주 깊고도 중요한 가르침을 통해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여리청문보살이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체 법이라고 하며, 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에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차분히 대답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위(有爲)이고, 다른 하나는 무위(無爲)입니다.”
유위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
곧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입니다.
무위란 그러한 생멸을 떠난 것,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유위(有爲)는 유위가 아니며, 무위(無爲)도 아니고,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보살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혀 줍니다.
“유위와 무위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임시로 세워 놓으신 이름일 뿐입니다.”
즉, 이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곧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유위라는 말도 무위라는 말도 모두 말에 의지해 세워진 것이며,
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생각과 분별이 덧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경전은 분명히 말합니다.
“헛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미 이름과 말을 떠난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자
부득이하게 이름을 세우고 유위라 하고, 무위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떤 개념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가도록 이끄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위에 머물러도 안 되고, 무위에 머물러도 안 됩니다.
심지어 “둘이 아니다”라는 말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 역시 결국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름과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는 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있다 없다
이런 기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구분은 중생을 돕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그래서 이 가르침은 특히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경전마다 말이 다른 것처럼 보이고,
수행법마다 방향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경전의 말은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세워진 길이며,
수행법 또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만나더라도
“이것이 옳다” 하고 붙잡기보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수행을 할 때에도
말에 머무르지 말고 그 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경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무언가를 더 쌓아 가는 일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말을 넘어, 생각을 넘어, 이름을 넘어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실은 드러납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조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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