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37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37

불법을 믿지 않던 남편의 마음이

말 한마디 없이 스스로 열리는 이야기입니다.
『경전산책 37 – 말하지 않았는데, 마음이 열렸다』
지금 마음에 꼭 필요한 분이 계실 것 같아
조심히 함께 나눕니다. 🙏
(5분 동영상)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37www.youtube.com

[경전산책 37]
믿음이 부족한 남편을 교화한 이야기
옛날 사위성 밖에 사는 어떤 부인은 청신녀(淸信女) 청신녀(淸信女)는 산스크리트어 upāsikā[우바이(優婆夷)]의 번역이다. 청신사와 청신녀는 불교를 깨끗이 믿는 남자, 여자라는 의미로 재가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를 주로 가리킨다. 족성자(族姓子) 족성녀(族姓女), 신남(信男) 신녀(信女), 선남자(善男子) 선여인(善女人)이라고도 한다. 선남자 선여인은 원래는 좋은 가문의 남자와 여자를 가리키는 말인데, 불전 안에서는 ‘불법에 신심이 있는 자’를 통칭하고 있다. 대승불교에서는 여부와 상관없이 보살도를 행하고 있는 보살을 다 아우르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한국 불교에서는 선남자는 ‘거사’로, 선여인은 ‘보살’로 불리기도 한다.
가 되어 계행을 순수히 갖추었다. 부처님께서 그 집 문에 가서 걸식하실 때, 부인은 부처님 발우에 밥을 담고 물러나 예배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나를 심으면 열이 생기고, 열을 심으면 백이 생기며, 백을 심으면 천이 생긴다. 이리하여 만이 생기고, 억이 생기며, 또 도를 보는 자리를 얻게 되느니라.”
불법을 믿지 않는 그 남편은 뒤에서 잠자코 부처님의 축원을 듣고 있다가 여쭈었다.
“사문 구담(沙門 瞿曇) 사문 구담은 불교에서 석가모니를 알리는 호칭으로, “사문”은 출가자, “구담”은 석가족의 성씨를 의미한다.
의 말씀은 어찌 그리 지나치십니까? 한 발우의 밥을 보시함으로써 그러한 복을 받고, 또 어떻게 도를 보는 자리까지 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어디서 왔는가?”
“저는 성 안에서 왔습니다.”
“네가 그 니구류(尼拘類) 반얀나무, 벵갈고무나무로 불리는 이 나무는 불교 경전에서는 ‘니구류수(尼拘類樹)’, ‘니구률(尼拘律)’이라는 이름으로 자주 등장한다. 인도 열대 지역이 산지인 교목의 일종. 무성한 가지와 잎은 열대의 폭염을 피하기에 좋은 그늘을 제공한다.
 나무를 볼 때 그 높이가 얼마나 되던가?”
“높이는 40리요, 해마다 수만 섬의 열매를 땁니다.”
“그 씨는 얼마만 한가?”
“겨자 만합니다.”
“한 되쯤 심었던가?”
“씨 하나를 심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네 말이 어찌 그리 지나친가? 겨자 만한 열매 하나하나를 심어 어떻게 그 높이가 40리가 되며 해마다 수십만 개의 열매를 따겠는가?”
“진실로 그러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땅은 지각이 없는 것이지마는 그 갚음이 그러하거늘, 하물며 기뻐하면서 한 발우의 밥을 여래에게 올림이겠는가? 그 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들 부부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곧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강승회(康僧會) 한역, 『구잡비유경(舊雜譬喩經)』상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37]
말하지 않아도 마음은 열립니다
― 불법에 마음을 열지 않던 남편이 스스로 고개를 끄덕인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의 경전산책에서는
불법을 믿지 않던 한 사람이
어떻게 마음을 열고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려 합니다.
오늘 이야기는
중국 삼국시대 오나라의 강승회 스님이 한역한
『구잡비유경』에 전해지는 짧지만 깊은 비유 이야기입니다.
옛날, 사위성 근처에 사는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여인은 불법을 깨끗이 믿는 재가 여성 신도,
곧 청신녀(淸信女)로서 계행을 소중히 지키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그 집 근처에 오셔서 걸식을 하셨고,
그 여인은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의 발우에 밥을 담아 올린 뒤
공손히 물러나 절을 올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를 심으면 열이 생기고,
열을 심으면 백이 생기며,
백을 심으면 천이 생긴다.
이렇게 공덕은 점점 자라나
마침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 문, 도를 보는 자리에 이르게 된다.”
그때, 그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불법을 믿지 않던 그 여인의 남편이었습니다.
남편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속에 의문이 일어났습니다.
“사문 구담이시여, 말씀이 너무 지나치신 것 아닙니까?”
그는 아직 부처님을 ‘세존’이라 부르지 않고, ‘사문 구담’이라 불렀습니다.
“고작 밥 한 발우를 보시했을 뿐인데
어찌 그처럼 큰 복을 말하시고,
어떻게 도를 보는 자리까지 이른다 하십니까?”
의심과 불신이 담긴 질문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조용히 되물으셨습니다.
“너는 성 안에서 오는 길에 커다란 나무를 보지 못하였느냐?”
“네, 보았습니다.”
“그 나무는 얼마나 크던가?”
“마을을 덮을 만큼 매우 크고, 해마다 수많은 열매를 맺습니다.”
“그 나무의 씨앗은 얼마나 크던가?”
“겨자씨만 했습니다.”
“한 되쯤 심었던가?”
“아닙니다. 단 하나를 심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작디작은 씨앗 하나도 때와 조건을 만나면 이처럼 큰 나무로 자라난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남편의 마음속에 맺혀 있던 의심이 풀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습니다.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땅은 지각이 없지만, 심은 씨앗에 그대로 응답하지 않느냐.
하물며 기쁜 마음으로 한 발우의 밥을 여래에게 올린 공덕이겠는가?
그 복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 자리에서 부부의 마음은 함께 열렸습니다.
굳어 있던 생각은 부드러워지고,
의심은 믿음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두 사람은 수다원의 도,
곧 성인의 첫 단계에 들게 되었습니다.
그때 남편은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한 발우의 밥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작은 마음 하나가
이렇게 큰 인연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여기에 있습니다.
이 경전은 ‘보시의 공덕이 얼마나 큰가’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불법을 믿지 않던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열리고 교화되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혹시 우리 곁에도
불법에 마음을 열지 못한 가족이나 이웃이 있지는 않습니까?
말로 설명하려 애쓰고, 이해시키려 애쓸수록
오히려 마음의 거리가 더 멀어질 때도 있습니다.
이 경전은 그럴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말로 이기려 하지 말고, 조용히 삶으로 보여 주라고.
따뜻한 태도 하나,
흔들리지 않는 신심 하나,
상대를 판단하지 않는 마음 하나가
어느 순간 그 사람의 마음을 스스로 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불법을 믿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면,
그분을 바꾸려 애쓰기보다 내가 먼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차분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고맙습니다.
성불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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