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reli 영등포 소식,소비자평가,뉴스,영등포구 지역포털 Wed, 13 May 2026 06:10:15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6.9.4 https://ydpcj.kr/wp-content/uploads/2017/07/cropped-panelbiz_logo-32x32.jpg 종교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reli 32 32 신은 왜 우리를 태어나게 했을까? https://ydpcj.kr/news/21679 https://ydpcj.kr/news/21679#respond Wed, 13 May 2026 06:09:03 +0000 https://ydpcj.kr/?p=21679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씨앗도사 김형동 교수님 강의 (4분 동영상) 신은 왜 우리를 태어나게 했을까?​ https://youtu.be/GxEwNoyXW6E?si=ESffkGaHvT8NHNxd 신은 왜 우리를 태어나게 했을까?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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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씨앗도사 김형동 교수님 강의 (4분 동영상)

신은 왜 우리를 태어나게 했을까?​

신은 왜 우리를 태어나게 했을까?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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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 https://ydpcj.kr/news/21652 https://ydpcj.kr/news/21652#respond Fri, 08 May 2026 14:22:10 +0000 https://ydpcj.kr/?p=21652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 💬 사람을 따를 것인가,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따를 것인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네 가지 분별의 기준. 오늘의 경전산책에서 함께 나눕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STnP5JhWey0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www.youtube.com [경전산책 52]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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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

💬 사람을 따를 것인가,

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따를 것인가.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남긴
네 가지 분별의 기준.
오늘의 경전산책에서 함께 나눕니다.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www.youtube.com

[경전산책 52]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야 할까?
가섭보살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 옳은 말씀입니다. 부처님 말씀이 진실하여 헛됨이 없으니 제가 금강석처럼 굳게 지키겠습니다. 언젠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비구들은 네 가지 법에 의지해야 합니다. 즉,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依法不依人],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며[依義不依語],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며[依智不依識], 요의경(了義經 ; 바른 뜻의 경전)에 의지하고 불요의경(不了義經 ; ‘바르지 못한 경전)에 의지하지 말 것입니다[依了義經不依不了義經].”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착하다, 가섭아.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곧 여래의 열반에 의지함이다. 모든 여래의 가르침이 곧 법의 성품이며, 법의 성품이 곧 여래다. 그러므로 여래는 항상 존재하며 변하지 않는 것인데, 여래를 무상하다고 말한다면 그는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하고 보지도 못한 것이다.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한 사람에게는 의지하지 말아라. 아라한과 같은 이는 세상에 나와 법을 지키는 사람이니 그런 줄 알고 의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는 여래의 은밀하고 깊은 법을 잘 알아 여래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줄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파계한 몸으로 자기 이익을 위해 여래는 무상하고 변한다고 말하면 그런 사람에게는 의지하지 말아라.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뜻은 깨달음이고 깨달았다는 뜻은 만족함이다. 만족하다는 뜻은 여래의 영원하고 변하지 않음이다. 또한, 이 뜻은 교법(敎法)이 영원함이고, 교법이 영원하다는 것은 승가가 영원하다는 뜻이다. 이것이 뜻에 의지함이다.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것은, 꾸며대는 언론과 번지르르한 문장에 팔리지 말라는 뜻이며, 교활하고 아첨하고 자기 이익을 위해 하는 말에 의지하지 말라는 뜻이다.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지혜란 곧 여래다. 여래의 공덕을 잘 알지 못하는 성문들의 분별은 지식이니 거기에는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여래가 곧 법신인 줄 알면 그것은 지혜이니 의지해야 한다. 여래의 방편으로 이루어진 몸을 보고 그것이 오온(五蘊)에 속하고 음식물로 기르는 것이라 한다면 그것은 지식이니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소승은 불요의이고 대승은 요의이다. 만약 여래가 음식물로 자란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영원해서 변하지 않는다고 하면 요의이다. 여래의 열반이 불이 꺼짐과 같다고 하면 불요의이고, 여래가 법의 성품에 든다면 요의이다. 성문승은 밭갈이가 서툴러 열매를 거두지 못함과 같으니 의지하지 말 것이고, 대승의 진리는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방편으로 말한 것이므로 의지해야 한다.
너희들은 이와 같은 네 가지 의지하고 의지하지 말 곳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나는 육안밖에 갖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 네 가지 의지할 곳을 말한 것이지, 지혜의 눈을 가진 이를 위해 말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의지할 곳을 거듭 말하겠다. 법이라 함은 곧 법의 성품이고, 뜻이라 함은 영원해서 변치 않음이며, 지혜라 함은 중생들이 모두 부처의 성품을 지냈다는 것이고, 요의라 함은 모든 대승의 법문을 통달하는 것이다.“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제6권 「여래성품(如來性品)」
부처님의 말씀은 의어(義語)이지 문어(文語)가 아니다
사리불이 여쭈었다.“일체의 법 질문 중에 ‘일체의 법(萬法)’이란 세간의 언설(言說)로 세운[安立] 법을 말한다. 말이라는 법은 도대체가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문자이고 말일 뿐, 뜻이 될 수는 없다. 모든 법의 참 뜻은 언설을 끊었기 때문이다.
이란 모두 다 언어와 문자일 뿐이나 언어와 문자의 모습이 바로 뜻이 되지는 않느니라. 실다운 뜻을 언어로 의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제 여래께서는 어떻게 법을 설하시겠습니까?” 금강경에서는 여래는 진어자(是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광어자(不誑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즉 참된 말만 하는 이이며, 실다운 말만 하는 이이며, 여실한 말만 하는 이이며, 속이지 않는 말만 하는 이이며, 다르지 않은 말만 하는 이라고 하였다. ‘참된 말씀'(眞語)이라 함은 일체의 유정 무정의 온갖 존재가 다 부처의 성품을 갖추었음을 뜻하고, ‘실다운 말씀'(實語)이라 함은 중생들이 악업을 지어서 괴로움의 과보를 받는 것을 뜻하고, ‘진리다운 말씀(如語)이란 중생이 선법(善法)을 닦으면 반드시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고 말씀하신 예이고, ‘속이지 않는 말씀(不誑語)’이라 함은 반야바라밀법이 삼세의 모든 부처님을 낸다고 말씀한 것이 반드시 헛되지 않음을 뜻하며, ‘다르지 않는 말씀(不異語)이라 함은 여래께서 하신 말씀은 처음에도 거룩하고 중간에도 거룩하고 마지막에도 거룩하여 그 깊은 뜻이 미묘하여 일체의 하늘 마귀나 외도가 더 뛰어난 말을 할수 없고 부처님의 말씀을 파괴할 수 없음을 뜻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내가 법을 설하는 것은 너희 중생들이 말씀을 일으키는 데(상태나 환경)에 있으므로 말할 수 없는 것을 설하는 것이니,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는 것이니라.
내가 설한 것은 의어(義語: 뜻말)이지 문어(文語:글말)가 아니니라.
중생이 설명하는 것은 문어이지 의어(義語)가 아니니라.
의어가 아닌 것은 모두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것이니, 공허하여 실답지 않은 말은 그 뜻에 대해 말하지 않으며, 뜻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은 모두가 속이는 말[妄語]이니라.”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2]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
— 부처님이 남기신 네 가지 기준
안녕하세요.
우리는 매일 수많은 말과 정보 속에서 살아갑니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어떤 말이 옳은지,
내 삶을 어디에 기대야 할지 혼란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대반열반경』에는 이런 혼란 속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남기신 네 가지 기준,
사의지(四依法)가 전해집니다.
이 가르침은 한 번의 설법으로 끝난 말씀이 아니라,
가섭존자가 ‘늘 듣던 그 말씀’을 다시 되뇌며 새기는 장면으로 펼쳐집니다.
가섭존자가 부처님께 아뢰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의지처를
저는 금강석처럼 굳게 지키겠습니다.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며(依法不依人),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며(依義不依語),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며(依智不依識),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依了義經 不依不了義經).’”
가섭은 마치 스스로를 단단히 다짐하듯,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속에서 다시 꺼내어 확인합니다.
이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착하다, 가섭아. 법에 의지하고 사람에게 의지하지 말라.
법에 의지한다는 것은 곧 여래의 열반에 의지함이니라.”
여기서 ‘법’은 단순한 규칙이나 교리 목록이 아닙니다.
여래의 가르침이 드러내는 법의 성품,
곧 변하지 않는 진리의 자리입니다.
열반경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겉모습만 보고 여래를 무상하다고 단정하는 이는
법의 성품을 알지 못한 자라고.
결국 이 첫 번째 기준은 분별의 출발점입니다.
사람의 권위나 외형이 아니라,
그 말이 진리에 맞는가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존경받을 수 있지만 실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법의 성품은 변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는 말과 뜻을 가르는 기준입니다.
“뜻에 의지하고, 말에 의지하지 말라.”
경전은 ‘뜻’을 깨달음과 연결합니다.
그 깨달음은 여래의 상주불변한 성품을 보는 자리입니다.
반대로 ‘말’은 겉만 번지르르한 표현, 이익을 위한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은 『금강삼매경』에서 더욱 또렷해집니다.
“내가 설한 것은 의어(義語)이지 문어(文語)가 아니니라.”
말은 손가락이고 뜻은 달입니다.
말과 글은 길을 가리키는 표지판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말을 붙들다 뜻을 놓치면 아무리 그럴듯해도 공허해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아는 것’의 깊이를 묻습니다.
“지혜에 의지하고 지식에 의지하지 말라.”
지식은 분별하고 축적합니다.
지혜는 통찰하고 꿰뚫어 봅니다.
지식은 많이 아는 것이고, 지혜는 바르게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래를 단지 오온으로 이루어진 몸,
음식으로 유지되는 존재로만 이해한다면
그것은 지식에 머무는 것이라고.
그러나 여래가 법신이며, 중생 모두가 불성을 지녔음을 안다면 그것이 지혜입니다.
열반경은 이를 직접 정의합니다
“지혜란,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녔음을 아는 것이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세 번째 기준은 더욱 절실합니다.
많이 아는 것보다 바르게 보는 것이 먼저입니다.
마지막은 가르침의 깊이와 방향에 대한 기준입니다.
“요의경에 의지하고 불요의경에 의지하지 말라.”
요의(了義)는 궁극의 뜻이 완전히 드러난 가르침이고,
불요의는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설한 방편의 가르침입니다.
열반경은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열반을 “불이 꺼진다”처럼 이해하면 불요의이고,
여래가 법의 성품에 든다고 본다면 요의입니다.
여래를 음식으로 자라는 존재로만 보면 불요의이고,
상주불변을 본다면 요의입니다.
부처님은 방편을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방편에 머물지 말고 그 방편이 가리키는 궁극의 방향을 보라고 하십니다.
형식이 아니라 본질을 보라는 말씀입니다.
이 네 가지를 설하신 뒤 부처님은 다시 거듭 당부하십니다.
“나는 육안밖에 갖지 못한 중생들을 위하여 이 네 가지 의지할 곳을 말한 것이지, 지혜의 눈을 가진 이를 위하여 말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다시 정리하십니다.
“법은 법의 성품이며,
뜻은 영원하여 변치 않음이며,
지혜는 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녔음을 아는 것이며,
요의는 대승의 깊은 법문을 통달하는 것이다.”
이 말씀은 단순한 교리 정리가 아닙니다.
스승이 곁에 없을 때에도 길을 잃지 않도록 남겨 준 분별의 기준입니다.
지금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을 따르기 쉽고,
말에 흔들리기 쉽고,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기 쉽고,
형식을 본질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가지는 옛 경전의 문장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붙드는 나침반이 됩니다.
결국 부처님의 이 말씀은
“스스로 분별하고, 스스로 등불이 되라”는 뜻과 다르지 않습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질문으로 마무리하고 싶습니다.
나는 지금, 무엇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사람인가, 말인가, 지식인가,
아니면 법의 성품과 뜻과 지혜와 궁극의 방향인가.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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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은혜는 하늘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다” https://ydpcj.kr/news/21645 https://ydpcj.kr/news/21645#respond Fri, 08 May 2026 03:35:07 +0000 https://ydpcj.kr/?p=21645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부모은중경의 가르침, 다시 새기는 ‘십대은(十大恩)’ “부모의 은혜는 하늘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다” 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 속 ‘십대은(十大恩)’이 담긴 이미지가 최근 온라인과 SNS를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미지에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평생 베푸는 열 가지 은혜가 담겨 있으며, 단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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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부모은중경의 가르침, 다시 새기는 ‘십대은(十大恩)’

“부모의 은혜는 하늘보다 깊고 바다보다 넓다”
불교 경전인 부모은중경 속 ‘십대은(十大恩)’이 담긴 이미지가 최근 온라인과 SNS를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미지에는 부모가 자녀를 위해 평생 베푸는 열 가지 은혜가 담겨 있으며, 단순한 효(孝)의 의미를 넘어 부모의 희생과 사랑을 되새기게 하는 메시지로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십대은’은 부모가 자녀를 키우며 겪는 고통과 헌신을 열 가지로 정리한 내용이다.
첫 번째는 ‘회탐수호은(懷耽守護恩)’으로,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목숨 걸고 보호하는 은혜를 뜻한다. 이어 출산의 고통을 견디는 ‘임산수고은(臨産受苦恩)’, 아이를 낳고 고통을 잊는 ‘생자망우은(生子忘憂恩)’이 이어진다.
또한 부모는 자신이 먹지 못하더라도 자식을 먼저 먹이고, 편한 자리보다 아이를 위해 불편함을 감수한다. 젖을 먹여 키우고, 더러운 것을 마다하지 않으며, 자녀가 먼 길을 떠나면 밤잠을 설칠 만큼 걱정한다는 내용도 담겨 있다.
특히 아홉 번째 ‘위조악업은(爲造惡業恩)’은 자식을 위해서라면 험한 일이나 고된 일도 마다하지 않는 부모의 희생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마지막 열 번째 ‘구경연민은(究竟憐愍恩)’은 자식이 어른이 되어도 끝없이 걱정하고 사랑하는 부모 마음을 나타낸다.
전문가들은 현대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가족 간 대화와 정이 점차 줄어드는 가운데, 이러한 전통적 가르침이 다시금 큰 울림을 주고 있다고 말한다.
불교계 관계자는 “부모은중경은 단순히 효도를 강요하는 경전이 아니라, 부모의 사랑과 희생을 깨닫고 감사의 마음으로 살아가라는 가르침”이라며 “가정의 달뿐 아니라 평소에도 부모의 은혜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한편 부모은중경 은 동아시아 불교문화권에서 오랫동안 읽혀온 대표적인 효(孝) 경전으로, 부모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인간의 도리와 감사의 삶을 강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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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 https://ydpcj.kr/news/21586 https://ydpcj.kr/news/21586#respond Fri, 01 May 2026 13:10:24 +0000 https://ydpcj.kr/?p=21586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효를 다시 묻는 경전 한 편…『부모은중경』이 전하는 관계의 의미 박영동 법사 ‘경전산책 51’ 통해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최근 가족 관계의 변화와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에서는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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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효를 다시 묻는 경전 한 편…『부모은중경』이 전하는 관계의 의미

박영동 법사 ‘경전산책 51’ 통해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최근 가족 관계의 변화와 개인화가 빠르게 진행되는 가운데, 불교 경전 부모은중경이 다시 주목받고 있다.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에서는 이 경전을 통해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를 되짚는 시간을 제시했다.
『부모은중경』은 정통 대장경에 포함된 경전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아시아 불교 문화 속에서 ‘효’를 주제로 널리 읽혀온 경전이다. 특히 단순한 도덕적 가르침을 넘어, 인간 관계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에도 의미를 가진다.
■ 이름 모를 뼈 앞에서 시작된 깨달음
경전은 부처님이 길을 가다 마른 뼈 무더기를 보고 예를 올리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제자들에게 부처님은 “이 뼈가 전생의 부모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대목은 모든 존재가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며, 부모와 자식의 관계 또한 단순한 현재의 관계를 넘어선 깊은 의미를 지닌다는 점을 보여준다.
■ 어머니의 희생으로 드러난 ‘십대은’
경전은 특히 어머니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설명하며, 이를 ‘십대은(十大恩)’으로 정리한다.
잉태와 출산의 고통, 양육의 헌신, 끝까지 이어지는 사랑까지 부모의 삶이 자식을 위해 얼마나 헌신되어 있는지를 강조한다.
박영동 법사는 “이 경전은 효를 강요하기보다, 은혜를 깨닫게 하는 데 초점을 둔다”며 “자각의 순간이 곧 실천의 출발점”이라고 설명했다.
■ “효는 거창한 희생 아닌 삶의 태도”
『부모은중경』은 부모 은혜를 갚는 방법으로 특별한 의식이나 형식을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경을 읽고, 바르게 살고, 부모를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강조한다.
특히 ‘햇과일을 얻거든 먼저 부모에게 드리라’는 구절은 일상 속 작은 실천이 관계를 회복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병든 부모 곁을 지키는 것이 진정한 효
경전은 부모가 병들었을 때 자식이 곁을 떠나지 말고 간호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단순한 효행이 아니라, 관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로 해석된다.
박 법사는 “효는 특별한 행동이 아니라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선택”이라며 “현대 사회에서 더욱 중요한 가치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 현대 사회에 던지는 질문
『부모은중경』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분명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가족 간의 소통 단절과 개인 중심 문화가 확산되는 현실에서, 이 경전은 관계 회복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환기시키고 있다.
■ 관계를 돌아보는 계기
전문가들은 『부모은중경』이 단순한 종교 경전을 넘어, 현대인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관계 성찰의 텍스트’로 기능한다고 평가한다.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은 이러한 메시지를 바탕으로, 효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더하고 있다.
영등포 소비자저널 관계자는 “지역사회에서도 가족 관계 회복과 세대 간 이해가 중요한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며 “이 같은 콘텐츠가 주민들의 삶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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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

 

 

💬 효를 말하지 않아도
관계를 돌아보게 하는 경전.
오늘의 경전산책,
『부모은중경』 이야기입니다.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www.youtube.com

 

 

[경전산책 51]

이와 같이 나는 들었습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왕사성에 있는 기수급고독원에서 대비구 3만 8천명과 여러 보살마하살과 함께 계셨습니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대중들과 함께 남방으로 가시다가 한 무더기의 마른 뼈

를 보셨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는 땅에 오체투지로 마른 뼈에 예배를 드리

 

셨습니다. 이를 보고 아난과 대중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삼계의 큰 스승이시며, 사생의 자비로운 아버지이

시며, 여러 사람들이 귀의해 존경하옵는데 어찌하여 마른 뼈에 예배하시옵니

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비록 나의 뛰어난 제자이고, 출가한 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널리 깨

닫지 못하는구나. 이 한 무더기의 뼈가 혹시 나의 전생의 오랜 조상이나 부

모의 뼈일 수도 있기에 내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다시 아난에게 이르셨습니다.

“아난아, 네가 이제 한 무더기의 마른 뼈를 둘로 나누어 보아라. 만일 남자

의 뼈라면 희고 무거울 것이요, 만약 그것이 여자의 뼈라면 검고 가벼울 것

이니라.”

아난은 의문이 풀리지 않아 부처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1

“세존이시여, 남자는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큰옷을 입고 띠를 매고 신을

신고, 모자를 쓰고 다니기 때문에 남자의 몸인 줄 압니다. 또한 여자는 세상

에 살아 있을 때 연지와 곤지를 곱게 바르고 좋은 향기를 풍기고 다니기 때

문에 여인의 몸인 줄 알게 됩니다. 그러나 지금처럼 죽은 후의 백골은 모두

같은데, 저로 하여금 어떻게 구별해보라고 하시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남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에 절에 가서 법회도 듣고 경도 외우며, 삼

보에 예배하고 부처님의 이름도 외웠을 것이니라. 그러므로 뼈는 희고 또한

무거울 것이니라. 그러나 반대로 여자라면 세상에 있을 때 음욕에만 뜻을 두

고, 아들 딸을 낳고 기르는 데 있어, 한 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서 말 서 되

나 되는 엉킨 피를 흘리며 자식에게 여덟 섬 너 말이나 되는 흰젖을 먹여야

하느니라. 그런 까닭으로 뼈가 검고 가벼울 것이니라.”

아난이 이 말씀을 듣고 어머님 생각에 가슴을 마치 칼로 도려내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래서 슬프게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머니의 은덕을 어떻게 보답해야 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자세히 듣고, 똑똑히 들어라. 내가 너를 위하여 소상하게 말해주

겠느니라.

어머니가 아이를 갖게 되면 열 달 동안 그 고통과 수고가 말할 수 없느니

라.”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한 지 첫달이 되면 그 태아는 마치 풀잎에 맺힌 이슬

과 같아서 아침에는 잘 있었다가 저녁에는 없어질 수도 있느니라. 이는 이른

새벽에는 피가 모여들었다가 낮이 되면 흩어지기 때문이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두 달이 되면 마치 엉킨 우유와 같이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셋째 달이 되면 태아가 마치 엉킨 피와 같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넷째 달이 되면 점차로 사람의 형상을 이루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다섯 달이 되면 어머니의 뱃속에서 오포가 생겨나게 되

느니라. 이 오포란 머리, 두 팔과 두 무릎을 합하여 모두 다섯 부분이 되느

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섯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여섯 가지 육

정(六精)이 열리게 되느니라.

여섯 가지 정이란, 첫째 눈이요, 둘째는 귀이며, 셋째는 코이며, 넷째는 입이

고, 다섯째는 혀이며, 여섯째로 뜻을 육정이라 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일곱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 뱃속에서 3백 6십 뼈마

디와 8만 4천의 털구멍이 생기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여덟 달이 되면 그 의식과 지혜가 생기고 또한 아홉 개

의 구멍이 뚜렷하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아홉 달이 되면 아이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무엇인가를

먹게 된다. 복숭아•배•마늘은 먹지 않고 오곡(五穀)만을 먹어야 하느니라.

어머니의 생장(生藏)은 아래로 향하고, 숙장(熟藏)은 위로 향한 사이에 한

산이 있는데 세 가지 이름을 갖느니라. 한 이름은 수미산이요, 또 한 이름은

업산이요,또 다른 이름은 혈산이다.

이 산이 한번 무너지게 되면 한 덩어리의 엉킨피가 되어서 태아의 입속으로

흘러 들게 되느니라.

어머니가 잉태한 지 열 달이 되면 비로서 태어나게 되는데 만일 효순(孝順)

할 아들이라면, 두 손을 모아 합장하고 나오므로 어머니의 몸을 상하지 않게

하느니라. 그러나 만일 오역(五逆)의 죄를 범할 자식이면 어머니의 아기집을

찢고, 손으로는 어머니의 심장이나 간을 움켜 쥐며, 발로는 어머니의 골반을

밟아서 어머니로 하여금 마치 1천개의 칼로 쑤시며 1만 개의 송곳으로 심장

을 쑤시는 것처럼 고통을 주게 되느니라. 이처럼 고통을 주고 이몸 받아 생

을 얻었음에도 그 위에 오히려 열 가지 은혜가 있느니라.”

첫째, 몸에 품어 보호해주신 은혜(懷耽守護恩,회탐수호은)

둘째, 낳으실 때 고통받으신 은혜(臨産受苦恩,임산수고은)

셋째, 자식을 낳고 근심을 잊으신 은혜(生子忘憂恩,생자망우은)

넷째, 쓴 것 삼키고 단 것 뱉아 먹이는 은혜(咽苦吐甘恩,연고토감은)

다섯째,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 누이는 어머니 은혜(回乾就濕恩,회건취습은)

여섯째, 젖을 먹여 길러주신 은혜(乳哺養育恩,유포양육은)

일곱째, 손발이 닿도록 깨끗이 씻어주신 은혜(洗濯不淨恩,세탁부정은)

여덟째, 먼길 떠나면 걱정하시는 은혜(遠行憶念恩,원행억념은)

아홉째, 자식을 위해 애쓰시는 은혜(爲造惡業恩,위조악업은)

열째,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은혜(究竟憐愍恩,구경연민은) [중략]

그때에 여러 대중들은 부처님께서 부모의 깊은 은덕을 말씀하심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제서야 큰 죄인임을 알았나이다. 어떻게 하여야 부모의 깊은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나이까?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부모의 은혜를 갚고자 하거든 부모를 위하여 이 경을 쓰고, 부모를 위하여 이 경을 읽고, 부모를 위하여 죄와 허물을 참회하고, 부모를 위하여 삼보를 공양하고, 부모를 위하여 재계를 지키고, 부모를 위하여 보시를 하고 복을 닦을 지니라.

또 자식된 사람이 밖에서 햇과일을 얻거든 집으로 가지고 와서 부모에게 드릴지니라. 부모는 이것을 얻어 기뻐하며 스스로만 먹을 수 없다고 하면서 삼보께 올려 공양하게 되면 곧 보리심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라.

 

부모가 병이 나면 곁을 떠나지 말고 친히 간호할지니라. 주야로 삼보께 귀의하고 부모의 병이 낫기를 축원하며 잠시라도 은혜를 잊어서는 안 되느니라.  

 

부모가 완고하여 삼보를 받들지 아니하고 어질지 못하여 남을 상하게 하고, 의롭지 못하여 남의 물건을 훔치고, 예절이 없어 몸을 단정히 하지 못하고, 신의가 없어 남을 속이고, 지혜가 없어 술에 빠지거든, 자식은 그 잘못을 말하고 깨우쳐 주어야 하느니라. 그래도 깨우치지 아니하면 울고 호소하며 스스로의 식음을 전폐할지니라. 부모가 비록 완고할지라도 자식이 죽는 것은 두려워하므로 은애와 정에 못이겨 바른길로 들어서게 되느니라.

부모가 마침내 오계를 받들어, 자비를 알아 죽이지 아니하고 옳음을 알아 훔치지 아니하고 예절을 알아 방탕하지 아니하고 믿음을 알아 속이지 아니하고 지혜를 알아 술 취하지 아니하면 이승에서는 편안 속에 살고 저승에서는 천상에 나게 되어, 부처님을 뵈옵고 법문을 들어 길이길이 지옥의 괴로움을 면하게 되느니라. 만일 능히 이와 같이 하면 효순하는 자식이라 할 것이요, 이러한 행을 닦지 않으면 지옥의 식구가 될 것이니라.“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1)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1]

부모은중경이 오늘 우리에게 묻는 것

— 뼈 한 무더기 앞에서 시작된 질문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본 대장경에 속한 경전은 아니지만,

오랜 세월 동안 동아시아 불교 문화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오래도록 흔들어 온 한 경전을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바로 『부모은중경』입니다.

이 경전은 중국에서 성립된 위경으로 분류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아주 날카롭고 현실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길가에 쌓인 이름 모를 뼈무더기 앞에 멈추어 서십니다.

그리고 그 뼈무더기를 향해 합장하고 공손히 예를 올리십니다.

이 모습을 본 아난과 제자들은 놀라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저 뼈들은 누구의 뼈인지도 알 수 없는데 어찌하여 예경하십니까?”

부처님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십니다.

“이 한 무더기의 마른 뼈가 어쩌면 내 전생의 부모이거나,

여러 생에 걸쳐 인연을 맺어 온 조상의 뼈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 이 뼈들 앞에 예를 올린 것이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더 깊은 의문에 빠져 다시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어떤 뼈는 희고 무거우며, 어떤 뼈는 검고 가볍습니까?”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설명하십니다.

만일 남자의 뼈라면,

생전에 절에 다니며 법문을 듣고 경을 외우고

삼보께 예배하며 염불하는 등 수행과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그 뼈는 희고 무겁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여자의 뼈는 다르다고 하십니다.

여자는 세상에 있을 때 정과 본능을 따라 자녀를 낳고 기르며,

한 번 아이를 낳을 때마다 많은 피를 흘리고,

평생 모유로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피와 기혈을 자식에게 내어 주기 때문에

그 뼈가 검고 가볍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여자의 삶이 가볍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생을 비워 한 생명을 살려 낸 삶의 깊이를 드러내는 비유입니다.

부처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과 대중들은

그 자리에서 깊이 고개를 숙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는 이제야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깊은지 알았습니다.

어찌하여야 이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부모은중경』의 중심 질문이 등장합니다.

효를 말하기 전에, 은혜를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의 은혜를 열 가지 큰 은혜, 곧 십대은(十大恩)으로 설하십니다.

그 가운데서도 경전은 어머니의 은혜를 가장 길게 설명합니다.

‘아이를 배에 품고 조심한 은혜,

출산의 고통을 대신 감당한 은혜,

젖을 먹이고 기른 은혜,

잠 못 이루며 돌본 은혜,

위험을 대신 맞은 은혜’.

이 은혜들은 말로 다 갚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 부모 은혜를 갚는 길을 특별한 제사나 의식으로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아주 소박한 삶의 태도로 말씀하십니다.

부모를 위해 경을 읽고, 부모를 위해 참회하고,

부모를 위해 삼보를 공양하고, 부모를 위해 계를 지키고,

부모를 위해 보시하며, 자신의 삶을 바로 세우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부모를 위해 무엇을 해 주라는 말이 아니라,

부모 앞에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경전은 아주 인상적인 삶의 장면들을 통해 효가 무엇인지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자식이 밖에서 햇과일을 얻거든 집으로 가져와 부모에게 드리라.”

작은 과일 하나지만,

그 안에는 부모를 먼저 떠올리는 마음,

잊지 않고 돌아보는 마음,

함께 나누려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경전은 부모가 그 과일을 혼자 먹지 않고 삼보에 공양하며 보리심을 일으킨다고 전합니다.

이 장면은 작은 마음 하나가

관계를 다시 이어 붙일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부모은중경』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경전은 관계가 더 어려워지는 순간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부모가 병들었을 때입니다.

부모가 병이 나면 자식은 곁을 떠나지 말고

직접 간호하며 밤낮으로 삼보에 귀의하고

부모의 병이 낫기를 축원하라고 합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것은 병을 고치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떠나지 않는다는 태도,

불편함과 번거로움 앞에서도 자리를 지키는 마음,

그것이 바로 효의 본모습이라고 경전은 말하고 있습니다.

햇과일 하나를 건네는 손길이 관계를 다시 열어 준다면,

병든 부모 곁을 지키는 시간은 그 관계를 끝까지 책임지는 수행입니다.

『부모은중경』이 말하는 효는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관계를 포기하지 않는 선택이며,

그 선택이 삶 전체를 수행으로 바꾸는 길입니다.

『부모은중경』에서 말하는 효는

유교적 복종이나 일방적인 희생이 아닙니다.

부모가 오계를 받아들이고

자비와 절제의 삶으로 돌아설 수 있도록

함께 삶의 방향을 바로 세워 가는 것,

그것이 이 경전이 말하는 효입니다.

그래서 경전은 마지막에 이렇게까지 말합니다.

“능히 이와 같이 하면 효순한 자식이라 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지옥의 식구가 될 것이다.”

이 말은 협박이 아니라, 관계를 방치한 삶이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보여 주는 경고입니다.

『부모은중경』은 자식에게만 말을 건네는 경전이 아닙니다.

부모에게도, 그리고 지금 이 사회 전체에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관계를 너무 쉽게 포기하고 있지는 않은가?’

‘부모와의 관계에서 미루고 있는 말은 무엇인가?’

이 경전이 위경이든 아니든,

이 질문만큼은 지금 우리 삶 한가운데에 놓여 있습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물음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부모의 삶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얼마나 자주 잊고 살고 있는가?”

효는 옛말이 되었을지 모르지만,

관계를 회복하려는 마음은 지금도 수행이 될 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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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https://ydpcj.kr/news/21530 https://ydpcj.kr/news/21530#respond Fri, 24 Apr 2026 16:26:08 +0000 https://ydpcj.kr/?p=21530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 보시는 같아 보여도,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이 들려주는 보시와 보시바라밀의 차이, 잠시 함께 살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QKBIRAFd7Nw&pp=0gcJCdQKAYcqIYzv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www.youtube.com [경전산책 50]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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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 보시는 같아 보여도,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이 들려주는
보시와 보시바라밀의 차이,
잠시 함께 살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www.youtube.com

[경전산책 50]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하고,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어찌하여 이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지만, 달라는 이가 없는데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항상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 나서 도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주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재물에 대하여 임금ㆍ도둑ㆍ수재(水災)ㆍ화재(火災)의 네 가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기쁘게 보시하면 이름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과보를 희망하여 주는 것은 이름이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고, 주고도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공포나 명예나 이양이나 집의 규모[家法]를 상속하거나 천상의 5욕락을 위한다면 교만을 위하는 것이고, 아는 동무[知識]를 위하는 것이고, 오는 세상의 과보를 위하는 것이므로 장사하는 법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서늘한 그늘과 꽃과 과실과 재목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보시라고 이름하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대열반을 수행하는 이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주고받는 재물을 보지 않으며 시절을 보지 않으며 복밭과 복밭 아님을 보지 않는다. 또 인을 보지 않고 연을 보지도 않고 과보도 보지 않으며, 짓는 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많음도 보지 않고 적음도 보지 않는다. 또 깨끗함도 보지 않고 부정함도 보지 않으며, 받는 이와 자기와 재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보는 이도 보지 않고 보지 않는 이도 보지 않는다. 또 자기와 남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방등한 대반열반의 항상 머무는 법을 위하므로 보시를 수행하고 모든 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온갖 중생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받는 이와 주는 이와 재물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한다.”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 『대반열반경』이 들려주는 보살 수행의 기준
안녕하세요.
오늘은 불교 수행에서 가장 기본이지만,
수행을 거듭할수록 더 깊어지는 질문,
‘보시’와 ‘보시바라밀’에 대해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면 흔히 “보시했다”고 말합니다.
돈을 내놓았을 때도, 시간을 썼을 때도,
도움을 주었을 때도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나 불교 경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경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 보시는 과연 바라밀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보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그 보시가 수행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선한 행위에 그치는지를 가르는 질문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수행의 핵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해탈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시된 대표적인 수행 체계가 바로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에서 시작해 바른 실천으로 이어지며,
자기 안의 번뇌를 다스리고 생사의 고통을 건너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는 보시나 인욕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행의 중심 과제로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우선 ‘내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수행의 지향점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나의 해탈’에서 ‘중생과 함께 가는 길’로 확장됩니다.
이때 보살의 수행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반야바라밀.
이 여섯 가지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왜 보시바라밀을 가장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보시는 보살 수행의 출발점이자,
중생과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말과 생각 이전에, 보시는 곧바로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보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물질을 나누는 재시(財施),
가르침을 전하는 법시(法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이 설명만 보면 보시는 무엇을 어떻게 주느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정말로 묻고자 하신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자리였습니다.
부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을 주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에서 주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전은 단순한 보시를 넘어 보시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제 『대반열반경』의 핵심 대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는 보시바라밀이 아니며, 어떤 보시는 보시바라밀입니까?”
이 질문은 보시의 기준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보살 수행의 기준을 묻는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보시가 일어나는 마음의 방향을 짚어 주십니다.
“달라는 이를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달라는 이가 없는데도 스스로 마음을 내어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다.”
여기서 차이는 ‘주느냐, 안 주느냐’가 아닙니다.
보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 마음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시바라밀은 잠깐 마음이 내켜서 하는 선행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지는 마음이며, 주고 난 뒤에도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는 보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기준을 하나 더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기대와 계산입니다.
“과보를 바라고 주는 것은 보시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보시를 아주 정직하게 비추어 줍니다.
돌아올 것을 바라기 시작하는 순간,
보시는 이미 조용한 장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반열반경』은 보시바라밀의 가장 깊은 자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주고받는 재물도 보지 않는다.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합니다.
이 자리에 이르면 ‘내가 준다’는 생각도,
‘네가 받는다’는 생각도,
‘무엇을 주었다’는 대상마저 점점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지혜가 함께하는 수행이 됩니다.
이제 이 질문은 경전에서 우리 삶으로 옮겨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며 주고 있는가?’
‘혹시 보시라는 이름으로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보시바라밀은 큰돈을 내놓는 일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마음을 내는 연습,
주고도 후회가 남지 않는 태도,
그 자리에서 보시는 보시바라밀로 바뀝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물음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주면서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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