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 보시는 같아 보여도,
마음은 다를 수 있습니다.
『대반열반경』이 들려주는
보시와 보시바라밀의 차이,
잠시 함께 살펴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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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 50]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하지 못하고, 어떤 보시를 보시바라밀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어찌하여 이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는가?
달라는 이가 있음을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라고 하지만, 달라는 이가 없는데 마음을 내어 스스로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때때로 주는 것은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항상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다른 이에게 주고 나서 도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면 이것은 보시며 바라밀이 아니지만, 주고 나서 후회하지 않으면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보살마하살이 재물에 대하여 임금ㆍ도둑ㆍ수재(水災)ㆍ화재(火災)의 네 가지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어 기쁘게 보시하면 이름을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과보를 희망하여 주는 것은 이름이 보시이며 바라밀이 아니고, 주고도 갚음을 바라지 않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라고 한다. 만일 공포나 명예나 이양이나 집의 규모[家法]를 상속하거나 천상의 5욕락을 위한다면 교만을 위하는 것이고, 아는 동무[知識]를 위하는 것이고, 오는 세상의 과보를 위하는 것이므로 장사하는 법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서늘한 그늘과 꽃과 과실과 재목을 얻기 위하여 사람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보시를 행한다면 그것은 보시라고 이름하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대열반을 수행하는 이는 보시하는 이와 받는 이와 주고받는 재물을 보지 않으며 시절을 보지 않으며 복밭과 복밭 아님을 보지 않는다. 또 인을 보지 않고 연을 보지도 않고 과보도 보지 않으며, 짓는 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많음도 보지 않고 적음도 보지 않는다. 또 깨끗함도 보지 않고 부정함도 보지 않으며, 받는 이와 자기와 재물을 가벼이 여기지 않으며, 보는 이도 보지 않고 보지 않는 이도 보지 않는다. 또 자기와 남을 헤아리지 않고 다만 방등한 대반열반의 항상 머무는 법을 위하므로 보시를 수행하고 모든 중생을 이익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온갖 중생의 번뇌를 끊기 위하여 보시를 행하며,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받는 이와 주는 이와 재물을 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행한다.”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21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0]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른가?
— 『대반열반경』이 들려주는 보살 수행의 기준
안녕하세요.
오늘은 불교 수행에서 가장 기본이지만,
수행을 거듭할수록 더 깊어지는 질문,
‘보시’와 ‘보시바라밀’에 대해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면 흔히 “보시했다”고 말합니다.
돈을 내놓았을 때도, 시간을 썼을 때도,
도움을 주었을 때도 그렇게 말하지요.
그러나 불교 경전은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경전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렇게 묻습니다.
“그 보시는 과연 바라밀인가?”
이 질문은 단순히 보시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를 묻는 말이 아닙니다.
그 보시가 수행으로 이어지는지, 아니면 선한 행위에 그치는지를 가르는 질문입니다.
초기불교에서 부처님께서 제시하신 수행의 핵심은
무엇보다 스스로의 해탈에 있었습니다.
그때 제시된 대표적인 수행 체계가 바로 팔정도입니다.
팔정도는 바른 견해에서 시작해 바른 실천으로 이어지며,
자기 안의 번뇌를 다스리고 생사의 고통을 건너는 길을 제시합니다.
이 흐름 속에서는 보시나 인욕은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수행의 중심 과제로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뿐입니다.
초기불교의 수행은 우선 ‘내가 어떻게 괴로움에서 벗어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대승불교에 이르면 수행의 지향점은 분명히 달라집니다.
‘나의 해탈’에서 ‘중생과 함께 가는 길’로 확장됩니다.
이때 보살의 수행 덕목으로 제시된 것이 바로 육바라밀입니다.
보시 · 지계 · 인욕 · 정진 · 선정 · 반야바라밀.
이 여섯 가지 가운데 부처님께서는 왜 보시바라밀을 가장 첫자리에 두셨을까요?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보시는 보살 수행의 출발점이자,
중생과 가장 먼저, 가장 직접적으로 만나는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말과 생각 이전에, 보시는 곧바로 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수행입니다.
일반적으로 불교에서는 보시를 세 가지로 설명합니다.
물질을 나누는 재시(財施),
가르침을 전하는 법시(法施),
두려움을 없애 주는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이 설명만 보면 보시는 무엇을 어떻게 주느냐의 문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정말로 묻고자 하신 것은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자리였습니다.
부처님이 보신 것은 ‘무엇을 주는가’가 아니라, ‘어떤 마음에서 주는가’였습니다.
그래서 경전은 단순한 보시를 넘어 보시바라밀을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보시와 보시바라밀은 어떻게 다를까요?
이제 『대반열반경』의 핵심 대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이렇게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시는 보시바라밀이 아니며, 어떤 보시는 보시바라밀입니까?”
이 질문은 보시의 기준을 묻는 질문이 아니라,
보살 수행의 기준을 묻는 질문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먼저 보시가 일어나는 마음의 방향을 짚어 주십니다.
“달라는 이를 보고 나서 주는 것은 보시이지만, 바라밀은 아니다.
달라는 이가 없는데도 스스로 마음을 내어 주는 것은 보시바라밀이다.”
여기서 차이는 ‘주느냐, 안 주느냐’가 아닙니다.
보시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 마음의 출처가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시바라밀은 잠깐 마음이 내켜서 하는 선행이 아니라,
꾸준히 이어지는 마음이며, 주고 난 뒤에도
후회와 미련이 남지 않는 보시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기준을 하나 더 분명히 하십니다.
바로 기대와 계산입니다.
“과보를 바라고 주는 것은 보시일 뿐 바라밀은 아니다.
그것은 마치 열매를 얻기 위해 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이 말씀은 우리의 보시를 아주 정직하게 비추어 줍니다.
돌아올 것을 바라기 시작하는 순간,
보시는 이미 조용한 장사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대반열반경』은 보시바라밀의 가장 깊은 자리를 이렇게 말합니다.
주는 이도 보지 않고,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주고받는 재물도 보지 않는다. 이를 삼륜청정(三輪淸淨)이라 합니다.
이 자리에 이르면 ‘내가 준다’는 생각도,
‘네가 받는다’는 생각도,
‘무엇을 주었다’는 대상마저 점점 가벼워집니다.
그래서 보시바라밀은 단순한 선행이 아니라,
지혜가 함께하는 수행이 됩니다.
이제 이 질문은 경전에서 우리 삶으로 옮겨옵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기대하며 주고 있는가?’
‘혹시 보시라는 이름으로 계산하고 있지는 않은가?’
보시바라밀은 큰돈을 내놓는 일이 아닙니다.
조건 없이 마음을 내는 연습,
주고도 후회가 남지 않는 태도,
그 자리에서 보시는 보시바라밀로 바뀝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물음으로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나는 지금, 주면서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마음으로 살고 있는가?”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