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뉴스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media/photo 영등포 소식,소비자평가,뉴스,영등포구 지역포털 Fri, 17 Jul 2026 15:07:19 +0000 ko-KR hourly 1 https://wordpress.org/?v=7.0.2 https://ydpcj.kr/wp-content/uploads/2026/07/cropped-ChatGPT-Image-2026년-6월-12일-오전-10_54_46-1-32x32.png 포토 뉴스 Archives » 영등포 소비자저널 https://ydpcj.kr/news/category/media/photo 32 32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https://ydpcj.kr/news/21963 https://ydpcj.kr/news/21963#respond Fri, 17 Jul 2026 15:06:27 +0000 https://ydpcj.kr/?p=21963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진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일까요? 『해심밀경』이 말하는 마음의 비밀을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mfPr_Q9cCek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www.youtube.com [경전산책 62] 뉴스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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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

진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일까요?
『해심밀경』이 말하는
마음의 비밀을
잠시 함께 들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www.youtube.com

[경전산책 62]

뉴스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그때 덕본(德本)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
세존이시여, 세존께서는 모든 법상(法相)에 공교한 보살을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란 어디에 한하여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께서는 어디에 한하여 그들을 모든 법상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하십니까?”
그때 세존께서 덕본보살에게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덕본이여. 그대가 지금 이와 같이 깊은 뜻을 여래에게 묻는구나. 그대는 지금 무량한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하려고, 세간과 모든 하늘ㆍ사람ㆍ아소락들을 불쌍히 여겨 의리(義利)와 안락을 얻게 하려고 이렇게 질문하는구나.
그대는 자세히 들어라. 내가 지금 그대를 위해 모든 법상을 말하리라.” 이른바 모든 법상에 대략 세 가지가 있으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이요, 둘째는 의타기상(依他起相)이요, 셋째는 원성실상(圓成實相)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인가? 이른바 이름으로 거짓되게 세워진 일체 법의 자성과 차별이고, 나아가 말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인연으로 생기는 자성이니, 즉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므로 저것이 생기는 것이다. 이른바 무명(無明)은 행(行)의 연이 되고, 나아가 순전히 큰 괴로움의 덩어리를 부르고 모은다.
무엇이 모든 법의 원성실상인가? 이른바 일체 법의 평등한 진여이다. 이 진여를, 모든 보살들은 용맹 정진을 인연하기 때문에 진리대로 생각하고 잘못됨 없이 사유하는 것을 인연하기 때문에 통달할 수 있다. 이러한 통달에서 점점 닦고 모아서, 나아가 위없는 정등보리(正等菩提)를 바야흐로 원만하게 깨치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모든 법의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변계소집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 모습 없는 법[無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의타기상을 깨닫는다면 곧 여실히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雜染相法]을 깨달을 것이며, 만일 모든 보살이 여실히 원성실상을 깨닫는다면 곧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一切淸淨相法]을 깨달을 것이다.
선남자여, 만일 모든 보살이 의타기상 위에서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다면 곧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을 것이요, 만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다면 곧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할 것이다. 이와 같아서 덕본이여, 모든 보살은 여실히 변계소집상과 의타기상과 원성실상을 깨닫는 까닭에, 여실히 모든 모습 없는 법과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과 청정한 모습의 법을 깨닫는 것이다. 여실히 모습 없는 법을 깨닫는 까닭에 온갖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고, 일체 잡되고 물든 모습의 법을 끊는 까닭에 일체가 청정한 모습의 법을 증득한다. 이에 한하여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 하며, 여래는 이에 한하여 그들은 모든 법의 모습에 공교한 보살이라고 시설한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
그때 승의생(勝義生)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바라건대 여래께서는 불쌍히 여기시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으며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본래 적정하여 자성이 열반이라고 하신 말씀에 담긴 밀의를 해석해 주십시오.”
그때 세존께서 승의생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승의생이여, 마땅히 알라. 나는 세 가지 무자성성(無自性性)의 밀의에 의지해 일체 법이 모두 자성이 없다고 말한다. 이른바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ㆍ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ㆍ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이다.
선남자여, 무엇이 상무자성성(相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변계소집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거짓된 이름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이 된 것이요, 자상을 말미암아 세워져서 모양을 삼은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생무자성성(生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의 의타기상이다. 무슨 까닭인가? 이는 다른 연의 힘을 의지했기 때문에 있는 것이요, 자연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생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엇이 모든 법의 승의무자성성(勝義無自性性)인가? 이른바 모든 법이 생무자성성을 말미암는 까닭에 무자성성이라 부르니, 즉 인연으로 생긴 법도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모든 법 가운데서 만일 이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라면 나는 그것을 드러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의타기상은 청정으로 반연한 경계가 아니니, 그러므로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부른다. 또 모든 법의 원성실상이 있으니, 또한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무슨 까닭인가? 일체 법의 법무아(法無我)의 성품을 승의(勝義)라 하며, 또는 무자성성(無自性性)이라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일체 법의 승의제이기 때문이며, 무자성성에서 나타난 것인 까닭이다. 이러한 인연에 의지해 승의무자성성이라 한다.
선남자여, 비유컨대 ‘허공의 꽃’과 같아서 상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꼭두각시의 모형과 같아서 생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1분(分)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비유컨대 허공은 오직 모든 색(色)이 없는 성품이 나타난 것으로서 일체 처소에 두루 함과 같이, 1분의 승의무자성성도 마땅히 알라, 또한 그렇다. 법무아의 성품이 나타난 것인 까닭이며, 일체에 보편한 까닭이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 해심밀경(解深密經) 제2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2]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안녕하세요.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세상,
정말 있는 그대로일까요?
아니면 내 생각과 감정이 덧붙여 만든 또 하나의 세계일까요?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을 사실이라고 믿습니다.
내가 느끼는 감정도,
내가 내린 판단도 대부분 맞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그 믿음부터 다시 물으십니다.
오늘은 『해심밀경』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덕본(德本)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모습을 잘 아는 보살이라 하셨는데,
어떤 이가 그 모든 법상(法相)을 제대로 아는 보살입니까?”
이에 부처님께서는 우리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차근차근 밝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셨습니다.
우리는 실제보다 덧붙여 보기도 하고,
인연 따라 이루어진 것임을 이해하기도 하며,
마침내 분별이 사라진 있는 그대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이제 경전에 나오는 표현으로 그 하나하나를 차례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변계소집상(遍計所執相)입니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를 본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어두운 밤에 노끈을 보고 뱀이라고 착각하듯이,
우리는 실제와 다르게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런 착각은 눈으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서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현실 위에 내 생각과 감정을 덧붙여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
“나는 왜 항상 안 될까”
이런 생각도 사실이라기보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해석일 뿐입니다.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둘째, 의타기상(依他起相)을 이해하게 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계는 그저 마음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원인과 조건이 모여 잠시 드러난 모습입니다.
꽃 한 송이도 햇빛과 물과 바람과 시간, 이 모든 인연이 모여 피어나듯이,
나 역시 수많은 인연 속에서 지금 이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것은 서로 기대어 일어나고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셋째, 원성실상(圓成實相)의 자리가 드러납니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이러한 분별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순간,
마음은 고요해지고 왜곡 없이 드러나는 진실을 만나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세 가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생각을 덧붙이면 괴로움이 되고,
인연으로 보면 한 걸음 벗어나게 되며,
그대로 보면 집착이 사라집니다.
즉,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마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의 차이가 괴로움과 자유를 가르는 길이 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십니다.
이 세 가지 모습조차 붙잡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는 처음에는 없는 것을 만들어 괴로워하고,
조금 더 나아가면 모든 것이 인연 따라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그 인연으로 생긴 것조차 고정된 실체는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
우리가 이해한 것,
심지어 ‘이것이 진실이다’라고 여기는 생각조차
모두 잠시 나타난 것일 뿐,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십니다.
이 가르침은 우리의 일상 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마음이 상했을 때
우리는 “나를 무시했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상황은 여러 조건이 모여 일어난 일일 뿐이고,
그 해석은 내 마음이 덧붙인 것입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보면
그 감정조차 붙잡을 실체가 없는 흐름일 뿐입니다.
이렇게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조금 덜 괴롭고, 조금 더 자유로워집니다
부처님은 세상을 다르게 보라고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붙잡고 있는 생각, 그것마저 내려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생각과 감정, 우리가 ‘진짜’라고 믿는 것조차
고정된 실체가 없는 것, 곧 무자성(無自性)이기 때문입니다.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우리는 진짜라고 착각할 뿐입니다.
이 사실을 이해할 때 마음은 가벼워지고
집착은 자연스럽게 사라집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이 질문 하나를 마음에 남기고 마치겠습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은 진실일까요,
아니면 생각일까요?
그리고 그 생각마저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잠시 멈추어 스스로의 마음을 조용히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우리가 붙잡고 있던 많은 것들이
이미 놓여 있음을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발행정보

제호: 영등포 소비자저널

도메인: ydpcj.kr

발행처: 영등포 소비자저널 편집국

이메일: crissmlee1@gmail.com

공식웹: https://ydpcj.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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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https://ydpcj.kr/news/21933 https://ydpcj.kr/news/21933#respond Mon, 13 Jul 2026 07:56:56 +0000 https://ydpcj.kr/?p=21933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진실일까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유위다, 무위다. 『해심밀경』은 그 모든 이름과 생각을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멈추고 함께 들어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Erqg9X9Haz4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www.youtube.com [경전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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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 내가 붙잡고 있는 생각은

정말 진실일까요?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
유위다, 무위다.
『해심밀경』은
그 모든 이름과 생각을 넘어
진실을 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멈추고 함께 들어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www.youtube.com

[경전산책 61]
그때 여리청문(如理請問)보살마하살이 부처님 앞에서 해심심의밀의(解甚深義密意)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最勝子)여, 일체 법은 둘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일체 법이 둘이 아니라 할 때, 어떤 것이 일체 법이며, 왜 둘이 없다고 합니까?”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여리청문보살에게 대답하였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 대략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함이 있는 유위(有爲)요, 둘째는 함이 없는 무위(無爲)입니다. 이 가운데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역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여리청문보살이 다시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물었다.
“최승자여, 왜 유위는 유위가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고 유위도 아닙니까?”
“선남자여, 유위란 곧 본사(本師)께서 거짓으로 시설(施設)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인 말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 하신 말씀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인 말로 말씀하신 것이어서 실다움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유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유위와 무위를 벗어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 없이 하신 말씀은 아닙니다. 일이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法性)에서 남들도 현전에 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유위라 한 것입니다.
선남자여, 무위란 것 역시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입니다. 만일 본사께서 거짓으로 시설하신 구절이라면 이는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일 변계소집인 말로써 말씀하신 것이라면 이는 끝내 갖가지 변계의 말로 말한 것이어서 진실을 이루지 못하는 까닭에 무위가 아닙니다.
선남자여, 유위란 것 또한 말에 떨어집니다. 설사 무위와 유위를 떠났다 해도 조금이라도 말한 것이 있으면 그 모습 또한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일없이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무엇이 일인가? 이른바 모든 성자는 성스러운 지혜와 성스러운 소견으로써 이름과 말을 떠난 까닭에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고, 곧 이러한 말을 떠난 법성에서 남들도 현전에 등정각을 이루게 하려고 거짓으로 이름과 생각을 세우고는 이를 무위라 한 것입니다.”
대당(大唐) 현장(玄奘) 한역해심밀경(解深密經) 제1권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1]
말로 붙잡을 수 없는 진실
– 유위와 무위는 왜 둘이 아닌가
안녕하세요.
우리는 늘 이것은 있다, 저것은 없다. 이것은 맞다, 저것은 틀리다.
이렇게 나누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 구분들은 정말로 진실일까요?
만약 그 모든 판단이 이름과 생각일 뿐이라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요?
오늘은 『해심밀경』 제1권에 나오는 아주 깊고도 중요한 가르침을 통해
이 질문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어느 때, 여리청문보살이 해심심의밀의보살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일체의 모든 법은 둘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체 법이라고 하며, 왜 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까?”
이에 해심심의밀의보살이 차분히 대답하셨습니다.
“선남자여, 일체 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유위(有爲)이고, 다른 하나는 무위(無爲)입니다.”
유위란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모든 것,
곧 우리가 보고 듣고 경험하는 이 세상의 모든 현상입니다.
무위란 그러한 생멸을 떠난 것, 변하지 않는 진리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유위(有爲)는 유위가 아니며, 무위(無爲)도 아니고,
무위 또한 무위가 아니며 유위도 아닙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는 잠시 멈추게 됩니다.
“도대체 무슨 뜻일까?”
보살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혀 줍니다.
“유위와 무위라는 말은 부처님께서 중생을 위해 임시로 세워 놓으신 이름일 뿐입니다.”
즉, 이것은 진실 그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가리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이름을 붙이면 그것이 곧 실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말합니다.
이름은 이름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유위라는 말도 무위라는 말도 모두 말에 의지해 세워진 것이며,
말로 표현되는 순간 이미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 아니라
생각과 분별이 덧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께서는 왜 굳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경전은 분명히 말합니다.
“헛되이 하신 말씀이 아니다.”
성자들은 이미 이름과 말을 떠난 자리에서 바로 깨달음을 이루었지만,
아직 그 자리에 이르지 못한 중생들을 위해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고자
부득이하게 이름을 세우고 유위라 하고, 무위라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가르침을 만나게 됩니다.
불교의 가르침은 어떤 개념을 붙잡으라는 것이 아니라,
그 개념을 통해 개념을 넘어가도록 이끄는 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유위에 머물러도 안 되고, 무위에 머물러도 안 됩니다.
심지어 “둘이 아니다”라는 말에도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 역시 결국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 가르침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습니다.
나는 지금 진실을 보고 있는가,
아니면 이름과 생각 속에 머물러 있는가?
우리는 늘 옳고 그름, 좋고 나쁨, 있다 없다
이런 기준 속에서 살아갑니다.
하지만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그 모든 구분은 중생을 돕기 위한 방편일 뿐,
그 자체가 진실은 아니라고.
그래서 이 가르침은 특히 처음 불교를 접하는 분들에게는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경전마다 말이 다른 것처럼 보이고,
수행법마다 방향이 다른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 점이 불교를 이해하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열쇠가 됩니다.
경전의 말은 붙잡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해를 돕기 위해 세워진 길이며,
수행법 또한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각자의 자리에서 진실로 나아가도록 이끄는 방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가르침을 만나더라도
“이것이 옳다” 하고 붙잡기보다,
“이것을 통해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경전을 읽을 때에도,
수행을 할 때에도
말에 머무르지 말고 그 말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경전이 우리에게 전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수행이란 무언가를 더 쌓아 가는 일이 아니라,
붙잡고 있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과정입니다.
말을 넘어, 생각을 넘어, 이름을 넘어
그 자리에서 비로소 진실은 드러납니다.
오늘의 경전산책은 여기까지입니다.
이 가르침이 지금 이 순간의 삶 속에서 조용한 길잡이가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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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 https://ydpcj.kr/news/21912 https://ydpcj.kr/news/21912#respond Sat, 04 Jul 2026 14:07:22 +0000 https://ydpcj.kr/?p=21912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 📩 누구의 말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정보는 많아졌지만, 진짜 스승을 알아보기는 더 어려운 시대입니다. 『대반열반경』이 말하는 참된 선지식의 기준, 오늘 경전산책에서 함께 들어 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AwyqKFRWwyA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www.youtube.com [경전산책 60] 선지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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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

📩 누구의 말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정보는 많아졌지만,
진짜 스승을 알아보기는
더 어려운 시대입니다.
『대반열반경』이 말하는
참된 선지식의 기준,
오늘 경전산책에서 함께 들어 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www.youtube.com

[경전산책 60]

선지식이란 누구인가?

“선남자야, 선지식(善知識)1)이라 함은 부처님과 보살과 벽지불(辟支佛)과 성문(聲聞)과 방등경전2)을 믿는 사람들이다. 어째서 선지식이라고 하는가? 선지식은 중생들을 교화하여 10악업을 여의고 10선업을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또 선지식은 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한다. 어떤 것을 법대로 말하고 말대로 행한다고 하는가? 자기가 살생하지 않고 다른 이로 하여금 살생하지 않게 하며, 나아가 자기가 바른 소견을 행하고 다른 이에게 바른 소견을 가르친다. 만일 이렇게 하는 이라면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한, 스스로 보리를 닦고 다른 이로 하여금 보리를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자기가 믿음과 계율과 보시와 많이 아는 것과 지혜를 닦아 행하고, 다른 이로 하여금 믿고 계율을 가지고 보시하고 많이 알고 지혜를 닦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지식이라고 함은 선한 법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선한 법이라고 하는가? 짓는 일이 스스로 즐겁기를 구하지 않고, 항상 중생을 위하여 안락을 구하며, 다른 이의 허물을 보고도 단점을 말하지 않고 입으로는 선한 말만 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허공에 있는 달이 초하룻날부터 보름날까지는 점점 자라듯이 선지식도 그와 같아서 배우는 일에서 나쁜 법은 멀리하고 선한 법은 자라게 한다. 선남자야,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이는 본래 계행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의 지견이 없었더라도 문득 있게 되며, 구족하지 못한 이는 구족하게 된다. 왜냐하면 선지식을 친근히 하는 까닭이며, 친근함으로 인하여 12부경의 깊고 묘한 이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제일 진실한 선지식은 보살과 부처님 세존이시다. 왜냐하면, 항상 세 가지로 잘 제어하는 까닭이다. 무엇이 세 가지인가? 첫째는 끝까지 부드러운 말[軟語]이며, 둘째는 끝까지 꾸짖음[呵責]이며, 셋째는 부드러운 말과 꾸짖음[軟語呵責]이다. 이런 뜻으로 보살과 부처님을 진실한 선지식이라고 한다.

또 선남자야, 부처님과 보살은 큰 의원이므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병을 알고 약을 알아서 병에 맞추어 약을 주는 까닭이다. 용한 의원이 여덟 가지 의술을 잘 알아서 먼저 병의 증세를 보는데, 증세에 세 가지가 있다. 풍병[風]과 열병[熱]과 물병[水]이다. 풍병이 있는 이에게는 타락기름[酥油]을 주고 열병이 있는 이에게는 석밀(石蜜)을 주고 물병이 있는 이에게는 강즙[薑湯]을 주는데, 병의 근원을 알고 약을 주어서 낫게 하므로 용한 의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범부에게 세 가지 병이 있음을 아신다.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음이다. 탐욕의 병이 있는 이는 해골 모양을 관찰하게 하고, 성내는 병이 있는 이는 자비한 것을 관찰하게 하고, 어리석은 병이 있는 이는 12인연을 관찰하게 한다. 이런 뜻으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뱃사공이 사람을 잘 건네주는 까닭으로 훌륭한 뱃사공이라고 하는 것처럼,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나고 죽는 바다에서 중생을 건네주므로 선지식이라고 이름한다. 그리고 또 부처님과 보살로 인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의 근본을 구족하게 닦게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마치 설산은 가지각색 미묘한 약의 근본이 되듯이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선한 법의 근본이 된다. 이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용한 의원이 여덟 가지 의술을 잘 알면서 병난 사람만 보고, 문벌과 단정하고 추한 것이나 재물이 있고 없는 것을 보지 않으며 모두 다스리니 세상 사람들이 훌륭한 의원이라 하는 것처럼, 부처님과 보살도 그와 같아서 중생들에게 번뇌의 병이 있는 것만 보고, 문벌이나 단정하고 추한 것이나 재물이 있고 없음을 보지 않으시고 자비한 마음으로 그들을 위하여 법을 말씀하시면 중생들이 듣고 번뇌의 병이 없어진다. 그러므로 부처님과 보살을 선지식이라고 한다.

이런 것을 말하여 선지식을 친근한 인연으로 대반열반(大般涅槃)에 가깝게 된다고 한다.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25권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60]

선지식이란 누구인가?

—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짜 스승’을 알아보는 법

안녕하세요.

요즘은 누군가를 스승으로 모시기보다,

유튜브 영상 한 편, 짧은 콘텐츠 몇 개,

심지어 인공지능의 답변까지도

“맞는 말 같아서” 그대로 믿어 버리는 일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 가지 위험이 숨어 있습니다.

정보는 많아졌지만,

누가 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주는 사람인지는

오히려 더 헷갈려졌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에게 더 절실한 질문이 생깁니다.

“선지식(善知識)은 누구인가?

그리고 나는 선지식을 알아볼 눈이 있는가?”

오늘 함께 살펴볼 내용은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선지식에 관한 가르침입니다.

경전에서 말하는 선지식은 이렇게 정의됩니다.

“큰 진리의 길을 깨닫고, 사람들을 그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게 이끄는 스승.”

쉽게 말하면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방향을 바르게 잡아 주는 사람,

지식을 많이 가진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향하도록 이끄는 사람입니다.

이 대목은 『화엄경』의 선재동자 이야기와도 이어집니다.

선재동자는 깨달음을 찾기 위해 무려 오십삼 명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배웁니다.

그 가운데에는 스님뿐 아니라

왕, 상인, 어부, 심지어 평범한 사람들까지 등장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직업이나 지위가 선지식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를 더 선한 삶으로 이끌어 주는 힘이 선지식을 만든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경전은 선지식을 어떻게 알아보라고 할까요?

부처님은 아주 분명한 기준을 제시하십니다.

선지식은 먼저

사람들이 나쁜 행동을 멀리하고 좋은 삶을 실천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십악(十惡)을 떠나 십선(十善)을 닦게 한다고 표현합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을 가까이할수록 내 삶이 조금이라도 더 맑아지고 선해지는가를 보라는 뜻입니다.

또 선지식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사람입니다.

말은 훌륭한데 삶이 따르지 못하면

그는 선지식이 아니라 그럴듯한 정보 제공자에 머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경전은 더 깊은 기준을 말합니다.

선지식은 자신도 성장하고, 다른 사람도 성장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믿음, 바른 삶의 태도, 나눔의 마음, 배움, 지혜가

실제 삶 속에서 자라도록 이끌어 주는 사람입니다.

특히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요즘은 “많이 아는 것”을 곧 “깨달음”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경전이 말하는 선지식은 지식만 늘려 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삶이 바르게 변하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또 선지식은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지 않고

항상 다른 사람의 행복을 먼저 생각합니다.

남의 허물을 쉽게 비난하지 않고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합니다.

이것이 경전이 말하는 선지식의 모습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선지식을 여러 가지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먼저 달의 비유입니다.

초승달이 점점 차서 보름달이 되듯이

선지식을 가까이하면 나쁜 습관은 줄어들고 좋은 마음은 점점 자라납니다.

그래서 원래 부족했던 사람도 선지식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성장하게 된다고 하십니다.

또 하나는 의사의 비유입니다.

부처님과 보살은 훌륭한 의사와 같습니다.

좋은 의사는 환자의 신분이나 재산을 보지 않고 오직 병만 보고 치료합니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마음속의 괴로움과 번뇌를 보십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마음의 병이 있다고 합니다.

욕심, 분노, 어리석음입니다.

욕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욕심을 줄이는 방법, 부정관을,

분노가 많은 사람에게는 자비를 기르는 방법, 자비관을,

어리석음이 많은 사람에게는 세상의 이치, 12인연을 깨닫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병에 맞는 약을 주는 존재.

그래서 부처님과 보살을 참된 선지식이라고 합니다.

또 선지식은 능숙한 뱃사공과도 같습니다.

사람을 강 건너로 안전하게 건네주듯

삶의 괴로움 속에서 건너가도록 돕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경전은 가장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가장 완전한 선지식은 부처님과 보살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이끄는 세 가지 방법을 완전히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드러운 말, 엄한 가르침, 그리고 상황에 맞게 두 가지를 함께 쓰는 것.

위로만 하는 것도 아니고, 꾸짖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

그 사람에게 맞게 이끄는 힘 — 그것이 참된 선지식의 특징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 시대에도 깊은 의미를 줍니다.

요즘은 확신 있게 말하는 사람이 영향력을 가집니다.

하지만 확신은 진리의 증거가 아닙니다.

말이 화려하다고 해서 그 사람이 선지식은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 사람을 따를수록 내 마음이 더 욕심 많아지는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더 따뜻해지는가.

내 말이 거칠어지는가, 아니면 더 부드러워지는가.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돌아보는 사람이 되는가.

경전의 기준으로 보면 선지식은 나를 의존하게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나를 성장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선지식을 가까이하는 인연이

곧 열반에 가까워지는 길이다.”

누구를 만나느냐가 인생의 방향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오늘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누구의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있는가?

그 말은 나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그리고 한 가지 더.

나는 지금 누군가에게 그런 선지식이 되고 있는가?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중요하지만

누군가의 길을 밝혀 주는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불자의 삶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1) 선지식(善知識)이란, 대도(大道)의 진리를 깨달아 중생들을 진리의 문에 들게끔 인도하는 수행자의 스승을 말한다. 『화엄경』 「입법계품」에는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오십삼선지식(五十三善知識)을 찾아가는 구도 과정이 상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선재동자에게 “그대가 구도의 길을 떠나 만나는 모든 사람이 그대의 스승이며, 선지식”이라고 일러준다. 선재동자가 만나는 오십삼선지식에는 보살과 천신, 비구, 비구니, 국왕, 상인, 어부, 심지어 외도(外道)와 창녀라는 직업여성도 등장한다. 지위와 신분 성별과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2) 방등(方等)이란 방정(方正) 평등의 뜻. 가로 시방(十方)에 뻗치는 것을 방(方), 세로 범부와 성인에 통한 것을 등(等)이라 한다. 보통 대승경전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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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9 https://ydpcj.kr/news/21851 https://ydpcj.kr/news/21851#respond Mon, 29 Jun 2026 14:51:37 +0000 https://ydpcj.kr/?p=21851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9 🌿 요즘 월드컵 축구 결과로 마음이 무거운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가 끝은 아닙니다. 『대반열반경』은 말합니다. 죄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서는 마음이라고. 일천제와 참회의 가르침, 오늘 경전산책에서 함께 살펴봅니다. 🙏 https://www.youtube.com/watch?v=k2p01pZIYEY 박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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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9

🌿 요즘 월드컵 축구 결과로

마음이 무거운 분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한 번의 패배가
끝은 아닙니다.
『대반열반경』은 말합니다.
죄보다 중요한 것은
다시 돌아서는 마음이라고.
일천제와 참회의 가르침,
오늘 경전산책에서 함께 살펴봅니다.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9www.youtube.com

[경전산책 59]
죄를 지어도 다시 구원될 수 있을까
— 일천제와 참회의 가르침
순타 부처님께서 쿠시나가라에서 열반에 들기 직전,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이다. 그의 이름은 춘다 캄마라푸타(Cunda Kammāraputta), 캄마라푸타란 금세공업자 또는 대장장이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한역 경전에서는 순타(純陀)라고 한다.
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이런 게송을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여러 곳에 보시하면, 찬탄은 할지언정 손해될 건 하나 없네.’
세존이시여,이 게송의 뜻은 무엇이며, 계율을 지키는 것과 계율을 파하는 것이 무슨 차별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시하는 것은 모두 찬탄할 만하다.”
“한 사람만 제외한다고 하셨는데 누구입니까?”
“이 경에서 말하는 계율을 파괴한 자이다.”
“저는 지금 알지 못하니 말씀하여 주십시오.”
“순타여, 계율을 파한 것은 일천제(一闡提)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란 ‘욕구를 따르는 사람’, ‘욕망을 가진 자’라는 뜻이다. 즉 현세에 집착하여 현실적인 욕망만을 추구할 뿐 교법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단선근(斷善根), 신불구족(信不具足), 대탐(大貪), 무종성(無種姓), 소종(燒種), 생맹(生盲), 무참괴(無慙愧) 등이라고 한역(漢譯)한다. 모두 선근을 끊어 버린, 보다 나은 인간으로 사는 삶을 포기한 생존의 대명사들이다.
이다. 그 외에는 누구에게 보시하여도 모두 찬탄할 일이며 큰 과보를 얻을 것이다.”
“일천제라는 것은 그 뜻이 무엇입니까?”
“순타여,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로서 추악한 말로 바른 법을 비방하거나, 이런 죄업을 짓고도 참회하지 않으며 부끄러운 생각이 없으면 이런 사람을 일천제로 나아간다고 한다. 그리고 4중금(四重禁) 불교 계율 중 가장 무거운 죄로, 승단에서 추방되는 죄를 말하며, 바라이죄(波羅夷罪, pārājika)라고도 한다. 음행, 도둑질, 살생, 거짓말을 의미한다.
을 범하거나 5역죄(五逆罪) 5역죄는 모든 악 중에서도 가장 극악한 악으로, 현세와 내세에 가장 나쁜 과보를 가져오는 악들이다. 불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5역죄는 무간지옥에 떨어질 지극히 악한 행위이므로 오무간업(五無間業)이라고도 한다. 5역죄(五逆罪)에는 부파불교의 5역죄와 대승불교의 5역죄가 있는데, 다음의 극악한 악업들을 말한다. 부파불교의 오역죄는 아버지를 죽인 죄, 어머니를 죽인 죄, 부처님 몸에 피를 나게 한 죄, 아라한을 죽인 죄, 화합승을 깨뜨린 죄이다
를 짓거나 하고, 이러한 중대한 일을 저지른 줄을 알면서도 애초부터 두렵거나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 털어놓고 참회하지 않으며, 부처님의 법을 보호하고 건설할 마음이 조금도 없으며, 훼방하고 천대하며 말에 허물이 크면 이런 사람도 일천제로 나아간다고 한다. 또 만일 불ㆍ법ㆍ승 삼보가 없다고 말하면 이런 사람도 일천제로 나아간다고 하니 이런 일천제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에게 보시하는 것은 모두 찬탄할 일이다.”
그때 순타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파계라고 말씀하신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만일 4중금을 범하거나 5역죄를 지으며 바른 법을 비방하면 이런 사람을 계율을 파괴했다고 한다.”
순타가 다시 여쭈었다.
“이렇게 파계한 자도 제도할 수 있습니까?”
“순타여, 인연이 있으면 제도할 수 있다. 만일 법복(法服)을 입고 있으면 아직 멀리 버려지지 않았으며, 마음에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항상 품고 스스로 책망하기를 ‘애달프다, 어찌하여 이런 중한 죄를 범하였으며, 괴로워라, 어찌하여 이런 고통의 법을 지었는가?’ 하여 스스로 깊이 뉘우치거나 법을 보호할 마음을 내어 바른 법을 세우려 하거나 ‘법을 보호하는 이는 내가 공양할 것이며, 대승경전을 읽는 이가 있으면 내가 뜻을 묻고 받아 지녀 읽고 외우고 통달하고 나서 다른 이에게 분별하여 해설하겠다’라고 하면, 나는 이런 사람은 파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선남자야, 왜냐하면 마치 해가 뜨면 모든 어둠과 가렸던 티끌을 없앨 수 있듯이, 이 대열반의 미묘한 경전이 세상에 나타나면 중생들이 한량없는 세월에 지은 죄업을 소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경에서는 ‘바른 법을 보호하면 큰 과보를 얻으며 파계한 이를 제도한다’고 하였다.
만일 바른 법을 비방한 이가 스스로 뉘우치고 법으로 다시 돌아와서 자기가 지은 나쁜 짓들이 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것과 같은 줄을 알고, 두려운 마음을 내어 놀라고 부끄러워하더라도 바른 법이 아니고는 구제할 수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바른 법으로 돌아와야 한다. 이렇게 말한 것처럼 귀의하는 이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며, 세상에서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 이르게 된다.
만일 그러한 죄를 범하고도 한 달이나 보름이 되도록 귀의하여 털어놓고 참회할 생각을 내지 않는 이에게 보시하면 얻는 과보가 매우 적을 것이다. 5역죄를 지은 것도 그와 같아서 뉘우치는 생각을 내고 속으로 부끄러워하며, ‘내가 저지른 나쁜 짓은 대단히 괴로움을 받을 것이니, 내가 마땅히 바른 법을 세우고 보호할 것이다’라고 하면 이런 이는 5역죄라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복을 얻을 것이며, 역죄를 짓고도 법을 보호하고 귀의할 마음을 내지 않으면 그런 사람에게 보시하는 것은 복이라고 말하기에는 부족하다.
또 선남자야, 무거운 죄를 범한 자를 분별하여 말할 것이니 너는 자세히 들어라. 죄를 범한 자가 마음을 내어 ‘바른 법은 여래의 비밀스러운 법장이니 내가 보호하고 세울 것이다’라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보시하면 좋은 과보를 얻을 것이다.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여인이 아기를 배어 해산할 달이 임박하였을 때에, 나라에 흉년이 들고 혼란하여서 다른 지방으로 도망을 갔다가 어느 당집에서 아기를 순산하여 길렀다. 그 뒤에 고국이 안정되고 풍년까지 들었다는 말을 듣고 아기를 데리고 고향으로 오던 길에 항하에 이르렀다. 그런데 물이 불어서 넘치고 물살이 급하여 아기를 업고 건널 수 없었다.
이에 여인이 생각하기를 ‘내가 아기와 함께 빠져 죽을지언정, 아기를 버리고 혼자서만 건널 수는 없다’ 하였다. 그리하여 아기와 함께 죽어서 마침내 천상에 태어났으니, 아기를 사랑하여 함께 건너려 했기 때문이다. 그 여인의 성품은 본래 나빴지만, 아기를 사랑한 인연으로 천상에 난 것이니, 4중금과 5역죄를 범하고도 법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내는 것도 그와 같다. 먼저는 비록 나쁜 업을 지었더라도 법을 보호하는 인연으로 세간의 위 없는 복밭이 되는 것이니 법을 보호하면 이렇게 한량없는 과보가 있는 것이다.”
순타가 다시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어떤 일천제가 스스로 뉘우치고 삼보를 공경하고 공양하고 찬탄하는 이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를 얻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그런 말을 하지 마라. 선남자야, 비유하면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암마라[망고] 열매를 먹고 씨를 뱉어서 버렸다가 다시 생각하기를 ‘그 씨 속에 단 것이 있을 것이다’ 하고, 버렸던 씨를 가져다가 깨물어 먹으니 매우 쓰기만 하였다. 그는 마음으로 후회하였으나 종자를 잃을까 염려하여 도로 주워서 땅에 심고 부지런히 보호하며 거름을 주고 물을 준다면 그 씨가 싹이 나겠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설사 하늘이 감로 비를 내린다고 해도 싹이 날 수 없습니다.”
“선남자야, 저 일천제도 그와 같아서 선근(善根)을 불살라 버렸으니 어떻게 죄를 없앨 수 있겠느냐? 선남자야, 만일 선한 마음을 낼 수 있으면 일천제라 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러한 뜻으로 모든 보시한 공덕으로 얻는 과보가 차별이 없지 않다. 왜냐하면, 성문 성문(聲聞)은 불법을 듣고 스스로의 해탈을 위하여 출가한 수행자이다.
에게 보시한 과보가 다르고, 벽지불 벽지불(辟支佛)은 외부의 것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깨달음을 얻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독각(獨覺), 연각(緣覺)이라고도 한다.
에게 보시한 과보가 다르다. 오직 여래께 보시한 인연으로 위없는 과보를 얻는다. 그러므로 모든 보시에 차별이 없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제10권 「여래성품(如來性品)」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9]
죄를 지어도 다시 구원될 수 있을까?
— 일천제와 참회의 가르침
안녕하세요.
오늘은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질문 하나를 함께 살펴보려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도 구원될 수 있을까요?
불교 경전에는 이런 말이 나옵니다.
“파계한 자는 제도할 수 있으나, 일천제는 제도할 수 없다.”
이 말만 보면 조금 놀라게 됩니다.
정말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뜻일까요?
이 말씀은 『대반열반경』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순타가 부처님께 여쭙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것을 보시하면 손해가 없다고 하셨는데,
계율을 지키는 것과 계율을 어기는 것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만 제외하고는 누구에게 보시해도 모두 찬탄할 만하다.”
순타는 다시 묻습니다.
“한 사람을 제외한다고 하셨는데, 그 사람은 누구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계율을 파괴한 자, 곧 일천제이다.”
여기서 말하는 일천제(一闡提, icchantika)는
욕망만을 따르고 선한 마음의 뿌리를 끊어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경전은 일천제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바른 법을 비방하고, 삼보를 부정하며,
죄를 짓고도 부끄러움이 없고, 참회할 마음도 없으며,
선한 마음의 가능성 자체를 포기해 버린 사람.
그래서 이런 상태의 사람에게 보시하면 큰 과보가 되기 어렵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매우 중요한 질문이 이어집니다.
순타가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계율을 파괴한 사람도 제도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인연이 있으면 제도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기준을 설명하십니다.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죄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살인을 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거나, 음행을 하거나, 수행의 경지를 속여 거짓말하는 것, 이것을 사중죄(四重罪)라고 합니다.
또 부모를 해치거나, 성자를 죽이거나, 승단의 화합을 깨뜨리거나, 부처님을 해치려 하는 것과 같은 극악한 행위는 오역죄(五逆罪)라고 합니다.
이런 죄는 불교에서 가장 무거운 악업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죄를 지었더라도 마음속에 부끄러움이 있고,
두려움이 있으며 참회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아직 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바른 법을 보호하려는 마음을 내고,
경전을 배우고, 법을 세우려는 마음을 낸다면
그 사람은 파계자가 아니라고까지 하십니다.
즉, 죄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라는 뜻입니다.
이어서 부처님은 한 가지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여인이 있었는데, 본래 성품이 좋지 못하고 악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이를 낳은 뒤 아기를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강을 건너다가 물살이 너무 거세자
혼자 살기 위해 아이를 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인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기와 함께 죽을지언정 아기를 버리고 혼자 살 수는 없다.”
결국 아기와 함께 죽었지만, 그 마음 하나로 천상에 태어났다고 합니다.
본래 나쁜 삶을 살았더라도 사랑과 희생의 마음 하나가
큰 과보를 가져왔다는 뜻입니다.
이는 죄의 과거보다 마음의 전환이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순타는 다시 묻습니다.
“그렇다면 일천제가 뉘우치면 어떻게 됩니까?”
부처님께서는 또 다른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망고 씨를 버렸다가 다시 주워 심어도
이미 씨가 죽어 버렸다면 싹이 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일천제는 선근을 불살라 버린 상태이니
어떻게 죄를 없앨 수 있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바로 이어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만일 선한 마음을 낼 수 있다면 그는 일천제가 아니다.”
이 한 문장이 불교의 희망을 말해 줍니다.
죄를 지었느냐가 아니라,
마음이 돌아설 수 있느냐가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잘못을 숨기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겉으로는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지만
마음속에는 두려움과 죄책감이 쌓여 있습니다.
문제는 죄 자체보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태도입니다.
잘못을 숨기면 마음은 점점 굳어지고
결국 스스로 선한 가능성을 끊어 버리게 됩니다.
그때 사람은 일천제와 같은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부끄러움을 느끼고
다시 돌아서려는 마음을 낸다면
그 순간 이미 길 위에 있습니다.
불교는 완벽한 사람을 말하지 않습니다.
돌아설 수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부처님은 죄를 보신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보셨습니다.
오늘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그리고 나는 돌아설 용기가 있는가?
넘어진 적이 있는가가 아니라
다시 일어나려는 마음이 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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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https://ydpcj.kr/news/21812 https://ydpcj.kr/news/21812#respond Sat, 20 Jun 2026 16:15:54 +0000 https://ydpcj.kr/?p=21812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 사자후는 큰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입니다. 부처님의 사자후 이야기, 잠시 마음 쉬어 가며 들어 보세요 🙏 https://www.youtube.com/watch?v=LBHx7T2nOt4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www.youtube.com [경전산책 58]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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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 사자후는 큰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입니다.
부처님의 사자후 이야기,
잠시 마음 쉬어 가며 들어 보세요 🙏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www.youtube.com

[경전산책 58]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만일 부처님이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승가가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이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實]가 있는지 없는지, 내[我]가 있는지 없는지,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깨끗함이 있는지 없는지, 항상함이 있는지 없는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인(因)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지음[作]이 있는지 없는지, 업이 있는지 없는지,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가 의심된다면, 너희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낱낱이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나는 진실로 하늘이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내게 와서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그때 그 회중에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하며 의복을 바로 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쭙겠으니 여래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허락해 주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지금 마땅히 이 보살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찬탄하며, 가지각색 향ㆍ꽃ㆍ풍류ㆍ영락ㆍ번ㆍ일산ㆍ의복ㆍ음식ㆍ좌복ㆍ의약ㆍ집ㆍ전당으로 공양하며 영접하고 전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지나간 부처님들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사자가 자기의 기운을 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뽐내며 네 발로 땅을 짚고 굴속에 있으면서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듯이, 이런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추면 이는 크게 사자후하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자왕이 새벽에 굴속에서 나와 몸을 다듬고 입을 벌리고 사방을 살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열한 가지 일을 위해서이다.
그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 행세를 하는 무리를 부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몸에 있는 기운을 시험하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있는 곳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새끼들로 하여금 있는 처소를 알게 하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여러 동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또 여섯 번째는 자는 놈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마음을 놓아버린 짐승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여러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복종케 하려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향상(香象)들을 조복하려는 것이며, 열 번째는 새끼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자기의 권속들을 장엄하려는 것이다.
모든 짐승들은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상들은 두려워 달아나며 똥을 지린다.
선남자들이여, 여우는 사자를 100년 동안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는데, 사자의 새끼는 3년만 되어도 큰 사자처럼 사자후를 한다.
선남자야, 여래 정각(正覺)께서는 지혜의 이빨과 발톱이며, 4여의족(如意足)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37보리분법 가운데 세 번째 주제는 네 가지 성취수단(iddhi-pāda, 四如意足)이다. 초기 경에서 잇디(iddhi)는 신통이나 성취를 의미하고 빠다(pāda)는 다리[足]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이를 여의족(如意足)으로 옮겼다. 주석서는 ‘성취를 위한 수단’과 ‘성취가 된 수단’의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성취수단은 열의(chanda), 정진(viriya), 마음(citta), 검증(vīmamsa)의 네 가지이다.
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10력이 용맹하고 대비(大悲)로 꼬리를 삼아서 4선정의 청정한 굴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마군을 쳐부수고 중생에게 10력을 보이시며, 부처님이 행하는 곳을 나타내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곳을 만드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편안히 어루만져 무명의 졸음에서 깨어나게 하시며, 나쁜 짓을 행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또, 육사외도는 사자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까닭이며, 부란나(富蘭那) 육사외도의 한사람인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은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윤리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여 도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
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2승((二乘) 성문과 연각, 보살은 모두 불제자이지만, 보살은 이타(利他)가 있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강조하는 반면, 성문, 연각은 자리(自利) 즉 자신의 깨달음 즉 열반의 증득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초기의 대승불교에서는 성문과 연각의 2승(二乘)과 보살을 구별하여 3승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법화경(法華經)』에서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고취하여 성문·연각·보살을 구분하면 참된 일승(一乘)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5주(住) 보살 5주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수행 계위인 10주(住) 중 5번째 단계인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를 의미한다.
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사견을 가진 4부중에게 두려운 생각이 없게 하려는 까닭에 사자후를 하신다.
거룩한 행ㆍ청정한 행ㆍ하늘의 행을 하는 굴속으로부터 몸을 쭉 펴면서 나오는 것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입을 벌리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사방을 살피는 것은 중생들이 4무애(無礙) 네 가지 막힌 곳이 없는 것으로 법무애(法無礙), 의무애(義無礙), 사무애(辭無礙), 요설 무애 (樂說無礙)의 네 가지이다.
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며, 네 발로 땅을 짚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지계(持戒)바라밀에 구족하게 머물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자후를 하시는 것이다. 사자후라 함은 결정한 말이니, 모든 중생이 모든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계시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성문이나 연각들은 한량없는 백천 아승기겁 동안에 여래 세존을 따라다니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거니와, 10주 십주는 보살이 수행하는 열 가지 단계를 말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52 보살 계위설이 정착된 이래 11번째인 초발심주(初發心住)부터 20번째인 관정주(灌頂住)까지의 계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10주(十住)는 마음이 진제(眞諦) 즉 진리에 안주하는 단계라는 뜻에서 주(住)라고 한다. ①발심주(發心住) ; 참 마음을 깨닫고자 발심하는 것이다. ②치지주(治地住) ; 잘못된 마음을 다스려 가는 것이다. ③수행주(修行住) ; 열심히 닦고 익혀 가는 것이다. ④생귀주(生貴住) ; 그래서 귀한 마음이 나는 것이다. ⑤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 수행에 편이한 여러 가지 방편을 이해하는 것이다. ⑥정심주(正心住) ;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⑦불퇴주(不退住) ;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⑧동진주(童眞住) ; 천진난만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⑨법왕자주(法王子住) ; 법왕의 아들이 됨을 자부하는 것이다. ⑩관정주(灌頂住) ; 진리의 물로 이마를 씻는 것이다.
 보살이 이 세 가지 행을 닦기만 하면 능히 사자후할 것을 알지니라.”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27권 「사자후보살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 두려움 없는 진리의 선언
안녕하세요.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청법가에도 나오고, 부처님께서 앉으신 자리를 사자좌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왜 하필 사자일까요?
사자는 짐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사자에 비유합니다.
또 사자는 상대가 아무리 작아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온 힘을 다한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어떤 중생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끄십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해 ‘사자후’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의 말씀으로 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과 그 원인과 멸과 도가 있는지 의심된다면 무엇이든 물어라.
나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의심이 있으면 묻고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이어서 사자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자가 한 번 울면 그 소리는 숲을 흔들고,
거짓을 드러내고, 잠든 것을 깨우고,
흩어진 질서를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사자후가 울려 퍼지면 짐승들은 숨고,
방심한 것들은 정신을 차리며,
허세를 부리던 것들은 정체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래의 사자후도 이와 같다고.
사자가 이빨과 발톱으로 위엄을 드러내듯 여래는 지혜를 힘으로 삼습니다.
사자가 꼬리를 세워 기운을 드러내듯 여래는 대자비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깊은 굴에서 나와 울 듯 여래는 깊은 선정 속에서 중생을 위해 사자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사자후는 감정에서 나오는 외침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가 완성된 자리에서 나오는 진리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사자후를 하셨을까요?
경전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군의 힘을 무너뜨리고,
삿된 견해를 깨뜨리며,
두려움 속에 있는 중생을 안심시키고,
무명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경전은 가장 중요한 선언을 남깁니다.
“사자후란 결정된 말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자후의 핵심입니다.
두려움 없는 진리의 선언이며,
누구나 본래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의 선언입니다.
경전은 또 한 가지 비유를 듭니다.
여우는 사자를 백 년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지만,
사자의 새끼는 몇 해만 지나도 사자처럼 울 수 있다고 합니다.
진리는 흉내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달을 때 자연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자후는 권위가 아니라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사자후는 무엇일까요?
요즘 우리를 흔드는 말들 가운데는 편안하게 들리지만,
마음을 더 묶어 두는 말도 있습니다.
“적당히 살아도 된다.”
“욕망을 따라도 괜찮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만의 이야기다.”
편안함은 주지만, 자유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하는 말들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오늘 우리 앞에 계셨다면,
아마 이렇게 사자후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너희 안에는 이미 밝은 마음이 있다.”
“탐욕과 두려움은 본래 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사자후는 큰 소리가 아닙니다.
진리를 두려움 없이 말하는 것이며,
자기 안의 가능성을 믿게 하는 선언입니다.
두려움 대신 용기를 선택하는 순간,
집착 대신 내려놓음을 선택하는 순간,
미움 대신 자비를 선택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이미 자기 삶 속에서 작은 사자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떤 소리를 내며 살고 있는가?
두려움의 소리인가, 자유의 소리인가?
조용히 마음을 바라보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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