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영등포 소비자저널=조석제 대표기자]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 사자후는 큰 소리가 아니라

진리를 두려움 없이 말하는 용기입니다.
부처님의 사자후 이야기,
잠시 마음 쉬어 가며 들어 보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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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산책 58]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이 만일 부처님이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승가가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이 있는지 없는지, 집(集)이 있는지 없는지, 멸(滅)이 있는지 없는지, 도(道)가 있는지 없는지, 실제[實]가 있는지 없는지, 내[我]가 있는지 없는지, 즐거움이 있는지 없는지, 깨끗함이 있는지 없는지, 항상함이 있는지 없는지, 승(乘)이 있는지 없는지, 유(有)가 있는지 없는지, 인(因)이 있는지 없는지, 과(果)가 있는지 없는지, 지음[作]이 있는지 없는지, 업이 있는지 없는지, 과보가 있는지 없는지가 의심된다면, 너희 마음대로 물어라. 내가 너희들에게 낱낱이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나는 진실로 하늘이나 사람이나 마군이나 범천이나 사문이나 바라문들이 내게 와서 묻는 것을 대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그때 그 회중에 이름이 사자후(師子吼)라고 하는 한 보살이 자리에서 일어나 용모를 단정히 하며 의복을 바로 하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예배하고 무릎을 세우고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 여쭙겠으니 여래께서는 크게 어여삐 여기시고 허락해 주십시오.”
그때 부처님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희들은 지금 마땅히 이 보살에게 공경하는 마음으로 존중하고 찬탄하며, 가지각색 향ㆍ꽃ㆍ풍류ㆍ영락ㆍ번ㆍ일산ㆍ의복ㆍ음식ㆍ좌복ㆍ의약ㆍ집ㆍ전당으로 공양하며 영접하고 전송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지나간 부처님들께 선근을 깊이 심어 복덕을 성취하였으므로 지금 내 앞에서 사자후를 하려는 것이다.
선남자야, 마치 사자가 자기의 기운을 알고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뽐내며 네 발로 땅을 짚고 굴속에 있으면서 꼬리를 휘두르며 소리를 내지르듯이, 이런 여러 가지 모양을 갖추면 이는 크게 사자후하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자왕이 새벽에 굴속에서 나와 몸을 다듬고 입을 벌리고 사방을 살피면서 벽력같이 소리를 지르는 것은 열한 가지 일을 위해서이다.
그 열한 가지란 무엇인가?
첫 번째는 사자가 아니면서 사자 행세를 하는 무리를 부수려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몸에 있는 기운을 시험하려는 것이고, 세 번째는 있는 곳을 깨끗이 하려는 것이고, 네 번째는 새끼들로 하여금 있는 처소를 알게 하려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여러 동무들로 하여금 두려운 마음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또 여섯 번째는 자는 놈을 깨우려고 하는 것이며, 일곱 번째는 마음을 놓아버린 짐승들이 정신을 차리게 하려는 것이며, 여덟 번째는 여러 짐승들로 하여금 와서 복종케 하려는 것이며, 아홉 번째는 향상(香象)들을 조복하려는 것이며, 열 번째는 새끼들을 가르치려는 것이며, 열한 번째는 자기의 권속들을 장엄하려는 것이다.
모든 짐승들은 사자후하는 소리를 들으면, 물에 사는 짐승들은 물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뭍에 사는 짐승들은 굴속에 숨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떨어지고, 향상들은 두려워 달아나며 똥을 지린다.
선남자들이여, 여우는 사자를 100년 동안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는데, 사자의 새끼는 3년만 되어도 큰 사자처럼 사자후를 한다.
선남자야, 여래 정각(正覺)께서는 지혜의 이빨과 발톱이며, 4여의족(如意足) 초기불교의 수행법을 체계적으로 담고 있는 37보리분법 가운데 세 번째 주제는 네 가지 성취수단(iddhi-pāda, 四如意足)이다. 초기 경에서 잇디(iddhi)는 신통이나 성취를 의미하고 빠다(pāda)는 다리[足]를 뜻한다. 중국에서는 이를 여의족(如意足)으로 옮겼다. 주석서는 ‘성취를 위한 수단’과 ‘성취가 된 수단’의 두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성취수단은 열의(chanda), 정진(viriya), 마음(citta), 검증(vīmamsa)의 네 가지이다.
과 6바라밀을 만족한 몸에 10력이 용맹하고 대비(大悲)로 꼬리를 삼아서 4선정의 청정한 굴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마군을 쳐부수고 중생에게 10력을 보이시며, 부처님이 행하는 곳을 나타내어 사견(邪見)을 가진 사람에게 귀의할 곳을 만드시며, 생사를 두려워하는 중생들을 편안히 어루만져 무명의 졸음에서 깨어나게 하시며, 나쁜 짓을 행하는 이가 뉘우침을 내게 하고, 사견을 가진 중생들을 깨우치게 하기 위하여 사자후를 하신다.
또, 육사외도는 사자후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려는 까닭이며, 부란나(富蘭那) 육사외도의 한사람인 부란나가섭[富蘭那迦葉]은 인과응보를 부정하고 윤리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여 도덕이 필요 없다고 주장하였다.
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2승((二乘) 성문과 연각, 보살은 모두 불제자이지만, 보살은 이타(利他)가 있어 자리(自利)와 이타(利他)를 동시에 강조하는 반면, 성문, 연각은 자리(自利) 즉 자신의 깨달음 즉 열반의 증득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초기의 대승불교에서는 성문과 연각의 2승(二乘)과 보살을 구별하여 3승을 말하기도 하였으나 『법화경(法華經)』에서는 회삼귀일(會三歸一) 사상을 고취하여 성문·연각·보살을 구분하면 참된 일승(一乘)이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
들로 하여금 뉘우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5주(住) 보살 5주 보살은 대승불교에서 보살의 수행 계위인 10주(住) 중 5번째 단계인 ‘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를 의미한다.
들로 하여금 큰 힘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바른 견해를 가진 사부대중으로 하여금 사견을 가진 4부중에게 두려운 생각이 없게 하려는 까닭에 사자후를 하신다.
거룩한 행ㆍ청정한 행ㆍ하늘의 행을 하는 굴속으로부터 몸을 쭉 펴면서 나오는 것은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교만을 깨뜨리려는 까닭이며, 입을 벌리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선한 법을 내게 하려는 까닭이며, 사방을 살피는 것은 중생들이 4무애(無礙) 네 가지 막힌 곳이 없는 것으로 법무애(法無礙), 의무애(義無礙), 사무애(辭無礙), 요설 무애 (樂說無礙)의 네 가지이다.
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며, 네 발로 땅을 짚는 것은 중생들로 하여금 지계(持戒)바라밀에 구족하게 머물게 하려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사자후를 하시는 것이다. 사자후라 함은 결정한 말이니, 모든 중생이 모든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계시어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성문이나 연각들은 한량없는 백천 아승기겁 동안에 여래 세존을 따라다니더라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거니와, 10주 십주는 보살이 수행하는 열 가지 단계를 말한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52 보살 계위설이 정착된 이래 11번째인 초발심주(初發心住)부터 20번째인 관정주(灌頂住)까지의 계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의미가 변화하였다. 10주(十住)는 마음이 진제(眞諦) 즉 진리에 안주하는 단계라는 뜻에서 주(住)라고 한다. ①발심주(發心住) ; 참 마음을 깨닫고자 발심하는 것이다. ②치지주(治地住) ; 잘못된 마음을 다스려 가는 것이다. ③수행주(修行住) ; 열심히 닦고 익혀 가는 것이다. ④생귀주(生貴住) ; 그래서 귀한 마음이 나는 것이다. ⑤구족방편주(具足方便住) ; 수행에 편이한 여러 가지 방편을 이해하는 것이다. ⑥정심주(正心住) ; 마음을 바르게 갖는 것이다. ⑦불퇴주(不退住) ; 물러섬이 없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⑧동진주(童眞住) ; 천진난만한 마음을 얻는 것이다. ⑨법왕자주(法王子住) ; 법왕의 아들이 됨을 자부하는 것이다. ⑩관정주(灌頂住) ; 진리의 물로 이마를 씻는 것이다.
 보살이 이 세 가지 행을 닦기만 하면 능히 사자후할 것을 알지니라.”
담무참 한역, 『대반열반경』 27권 「사자후보살품」
[박영동 법사의 경전산책 58]
부처님께서 사자후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 두려움 없는 진리의 선언
안녕하세요.
불교에서 자주 등장하는 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자후(獅子吼)입니다.
청법가에도 나오고, 부처님께서 앉으신 자리를 사자좌라고 부르기도 하지요.
왜 하필 사자일까요?
사자는 짐승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존재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위대한 깨달음을 이루신 부처님을 사자에 비유합니다.
또 사자는 상대가 아무리 작아도 가볍게 여기지 않고 온 힘을 다한다고 하지요.
마찬가지로 부처님도 어떤 중생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끄십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사자의 포효에 비유해 ‘사자후’라고 부릅니다.
오늘은 『대반열반경』 「사자후보살품」의 말씀으로 그 뜻을 살펴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만일 부처가 있는지 없는지, 법이 있는지 없는지,
괴로움과 그 원인과 멸과 도가 있는지 의심된다면 무엇이든 물어라.
나는 어떤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것이 없다.”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부처님은 믿음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의심이 있으면 묻고 확인하라고 하셨습니다.
진리는 질문 앞에서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경전은 이어서 사자의 모습을 비유로 설명합니다.
사자가 한 번 울면 그 소리는 숲을 흔들고,
거짓을 드러내고, 잠든 것을 깨우고,
흩어진 질서를 바로잡습니다.
그래서 사자후가 울려 퍼지면 짐승들은 숨고,
방심한 것들은 정신을 차리며,
허세를 부리던 것들은 정체가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은 말씀하십니다. 여래의 사자후도 이와 같다고.
사자가 이빨과 발톱으로 위엄을 드러내듯 여래는 지혜를 힘으로 삼습니다.
사자가 꼬리를 세워 기운을 드러내듯 여래는 대자비를 바탕으로 삼습니다.
깊은 굴에서 나와 울 듯 여래는 깊은 선정 속에서 중생을 위해 사자후를 하신다는 것입니다.
즉, 부처님의 사자후는 감정에서 나오는 외침이 아니라
지혜와 자비가 완성된 자리에서 나오는 진리의 선언입니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왜 사자후를 하셨을까요?
경전은 그 이유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마군의 힘을 무너뜨리고,
삿된 견해를 깨뜨리며,
두려움 속에 있는 중생을 안심시키고,
무명의 잠에서 깨어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경전은 가장 중요한 선언을 남깁니다.
“사자후란 결정된 말이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이 있으며, 여래는 항상 존재하여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사자후의 핵심입니다.
두려움 없는 진리의 선언이며,
누구나 본래 깨달을 수 있다는 확신의 선언입니다.
경전은 또 한 가지 비유를 듭니다.
여우는 사자를 백 년 따라다녀도 사자후를 하지 못하지만,
사자의 새끼는 몇 해만 지나도 사자처럼 울 수 있다고 합니다.
진리는 흉내로 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깨달을 때 자연히 드러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자후는 권위가 아니라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시대의 사자후는 무엇일까요?
요즘 우리를 흔드는 말들 가운데는 편안하게 들리지만,
마음을 더 묶어 두는 말도 있습니다.
“적당히 살아도 된다.”
“욕망을 따라도 괜찮다.”
“깨달음은 특별한 사람만의 이야기다.”
편안함은 주지만, 자유까지 데려다주지는 못하는 말들입니다.
만약 부처님이 오늘 우리 앞에 계셨다면,
아마 이렇게 사자후를 하셨을지도 모릅니다.
“너희 안에는 이미 밝은 마음이 있다.”
“탐욕과 두려움은 본래 너의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도 자유로울 수 있다.”
사자후는 큰 소리가 아닙니다.
진리를 두려움 없이 말하는 것이며,
자기 안의 가능성을 믿게 하는 선언입니다.
두려움 대신 용기를 선택하는 순간,
집착 대신 내려놓음을 선택하는 순간,
미움 대신 자비를 선택하는 순간—
그때 우리는 이미 자기 삶 속에서 작은 사자후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오늘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떤 소리를 내며 살고 있는가?
두려움의 소리인가, 자유의 소리인가?
조용히 마음을 바라보며 오늘의 이야기를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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